• 민주주의, 운명 거부하고
    그 저항을 제도화하는 힘
    [책소개] 『민주주의를 넘어』 (로베르토 M. 웅거/ 앨피)
        2017년 12월 09일 12: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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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촛불혁명 이후

    브라질 출신의 하버드 로스쿨 교수인 로베르토 웅거가 이 책을 출간한 것은 1998년이다. 잘 알다시피 바로 그해 대한민국과 웅거의 모국 브라질은 IMF 구제금융을 받았다. 웅거는 대한민국과 브라질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이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에 직면해 방식은 다르지만 똑같은 문제를 앓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20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브라질은?

    이 책을 번역한 건국대 법학대학원 이재승 교수는 성공적으로 IMF 체제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 이면에 ‘헬조선’으로 상징되는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 사회에, 웅거의 진단과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어느 누구도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명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이때, 이 책은 세계가 처한 곤경을 헤쳐 나갈 원대한 비전과 구체적인 정책을 보여 주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불평등, 소득 및 고용 양극화, 높은 실업, 대중의 좌절과 열패감 등 모든 결함의 총합으로서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극복할 방법이 민주주의에 있으며, 그 대안으로 정치 자체의 민주화, 경제와 사회 그리고 인간관계의 민주화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촛불혁명 이후를 준비해야 할 우리에게 큰 울림을 던져 준다. 웅거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촛불항쟁을 제도화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운명을 거부하고, 이 저항을 제도화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급진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 책이 표방하는 사회경제 유형은 ‘급진민주적 시장’으로 집약할 수 있다. 여기서 ‘급진’은 전통적 의미의 좌파라기보다는 기존의 서구 영미식 고도 시장경제와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유럽의 사민주의 사회경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특한 발전 체제를 이어온 일본과 독일모델, 그리고 인도·라틴아메리카로 대표되는 종속이론까지 가로지르며 극복하고 뛰어넘으려는 야심찬 기획이라는 의미에서 ‘래디컬’하다는 뜻이다.

    동구 사회주의 몰락 이후까지 고려할 때 경제사회사상을 둘러싸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의 지성들이 벌인 전투는, 거칠게 보면 1980년대 말까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싸움 그리고 20세기 후반 이후 지금까지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다양한 유형과 모델들’ 사이의 각축이다.

    웅거는 지금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사회경제체제는 영미식 시장경제, 유럽의 사민주의, 일본모델 독일모델 스웨덴모델 등이 아니라고 말한다. 현존하는 모든 사회경제 모델과 유형 체제는 전체 조직과 개인의 열망, 이 두 가지가 한데 결합되지 못한 공통된 결함을 안고 있다. 웅거는 중국·러시아·인도·브라질 등 21세기 지구상에 새로 도약 중인 ‘이행기 경제’뿐 아니라, 선진 시장경제 그리고 한국·대만 등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경제적 성취를 이룬 개발도상 경제까지 현재 세계 각국의 모든 경제에 필요한 것이 ‘실험주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실험주의는 반드시 권위주의나 기득권에서 해방된 ‘민주적’ 실험이어야 한다.

    진보 보수를 뛰어넘는 민주적 실험주의

    이 책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찾는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작업이다. 오늘날의 대의민주제, 규제받는 시장경제, 자유로운 시민사회의 제도적 형태 등 다원주의의 최신 변형이기도 하다.

    “급진민주적 대안이 해결해야 할 실천적인 문제들을 이 대안이 표방하는 민주적·실험주의적 정신과 연결하여 이 대안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두 가지 통찰이 필요하다. 첫 번째 통찰은 저축과 생산, 금융과 산업을 잇는 약한 고리를 용인한다. 그 다음에는 동일한 경제 안에 대안적인 재산권 체제가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도구들을 마련하여 생산 자원의 분산적인 배정 기제를 확장시키고 배정의 수혜자들도 확대시켜야 한다. 급진민주의적 대안을 촉진하는 두 번째 통찰은, 노동자들이 현재의 자리에 안주하여 참호를 구축한다면 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을 진정으로 옹호해 줄 것은 그들의 역량을 향상시킬 제도이다.”

    웅거는 기존의 정치경제적 개혁 프로그램 강령들은 그 해결 불가능한 어려움과 염려들 때문에 수수께끼가 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어려움에 대한 끊임없는 염려들은 … 물려받은 정치적·경제적 제도들의 틀 안에는 그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최근의 정책 논쟁이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우리의 정책 토론이 이러한 선택지들을 제한하는 제도적 구조틀에 대한 토론으로 이행하지 못할 경우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변한다는 점이다.”

    성장 갈등마저 껴안는 생산적 실험주의

    웅거가 주장하는 실험주의는 ‘생산적 투자’와 ‘자원 배분의 효율성’처럼 시장에서 지향하고 달성해야 할 목표와 그 결과물인 성장과 갈등하거나 이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투자와 지속적 성장이야말로 민주적 실험주의 프로그램이 추구해야 할 핵심 요소이다. 사회경제적 취약 집단 및 계급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인 선별적 보상 프로그램이 아니라 ‘생산적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영미 신자유주의 경제가 주조해낸 용어 ‘생산적 복지’를 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웅거의 생산적 실험주의는 민주적 시장, 민주적 경제질서 구축이라는 ‘가치’와 병행되도록 고안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기존의 이념 스펙트럼상의 진보적 좌파 세력들이 제시해온 최대강령적 프로그램과는 다른 웅거식 프로그램의 특징이자 ‘가치’다. “단순한 분배주의를 넘어 생산주의적이어야 하고, 현존하는 경제적 전위의 영토를 넘어 경제적 전위주의를 확장해야 한다.”

    민주적·생산적 실험주의의 제도 목록

    웅거는 진보 개혁의 ‘새로운 얼굴’에 반드시 그려 넣어야 할 구체적인 제도 및 정책 목록과 조합도 제시한다. “사회조합주의는 유연성과 포용이라는 두 가지 전복적 요소 중 유연성이 홀로 작동하는가 아니면 유연성과 포용이 조화를 이루며 작동하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미래를 갖는다. 더 많은 포용성 없는 더 큰 유연성과 더 많은 포용성 있는 더 큰 유연성이 그것이다.

    “… 첫 번째 길은 독일 및 일본식 시장경제의 뚜렷한 특징들을 이루었으나 점차 쇠락의 길을 걷고 있고, 대담한 제도적 혁신이 없다면 두 번째 길은 출발할 수도 없고, 심지어 그 길이 무엇인지 설명조차 할 수 없다. 이런 길을 상상하는 것은 기업을 재구성할 제3의 프로그램에로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은 기존의 보수적인 기업 쇄신 경영 프로그램과 사민주의적 노동자 옹호 프로그램, 둘 다를 대체할 대안을 제공할 것이다. 바로 ‘급진민주적 프로그램’이다. 민주적 실험주의가 사회 전체에 걸친 실험주의적 기회의 일반화와 개인 역량 및 그 보증 수단의 향상을 조합함으로써 전진한다면, 기업 개혁 프로그램에도 민주적 실험주의자의 야망에 부응하는 동맹이 있어야 한다.”

    케인스주의와 종속이론, 진보적 사유의 한계를 넘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대항담론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케인스주의적 사회경제 처방전도, 자립적 민족주의를 내세운 주변부 종속이론도 실제로 그것이 실행돼온 경험을 돌이켜보면 자기파괴적이고 대중영합주의적인 사상으로, 요컨대 “오히려 쇄신과 효율을 제약하는” 사회경제사상으로 변모하고 말았다고 웅거는 지적한다.

    “이 같은 경제적 대중영합주의의 중심에 의사疑似 케인스식 정치경제학이 있다. 케인스주의는 국가를 강화했다. 생산과 재산 체제를 급진적으로 개혁하거나 부와 권력을 과감하게 재분배하라는 요구를 노동계와 좌파가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케인스주의는 정부를 건전재정 원칙에서 해방시켰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3세계 정부들이 선호하던 경제적 대중영합주의는 국가의 허약성을 드러냈다. … 이러한 경제성장 전략은 기존의 비교우위론에 맞서는 민족주의적 반란의 도구로 시작되어 어느 정도까지는 대의를 성취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제는 그 능력을 소진하고 오히려 쇄신과 효율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변모한다.”

    “ …실천과 시민 참여의 조직적인 고양에 우호적인 정치제도 속에 정착시켜야 한다. 새로운 개혁 방침들은 법적?제도적 관념들에 의해 촉발되는 일련의 순차적인 제도적 쇄신들을 요구한다. 이러한 법적?제도적 관념을 너무 적게 제안해 온 것이 현대 진보적 사유의 치명적 맹점이었다.”

    피케티 등이 놓친 집단-개인의 포용적 정치경제질서

    21세기 세계화 시대의 노동계급과 자본을 다룬 정치철학자 네그리의 《제국》, 성장과 자본 축적을 노동계급과의 갈등으로 설명한 아글리에타의 《조절이론》, 동구권 이행기 경제를 다룬 쉐보르스키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스티글리츠의 《시장으로 가는 길》, 불평등에 대한 놀라운 시각을 제시한 밀라노비치의 《우리는 왜 불평등해졌는가》, 그리고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경제성장과 제도를 다룬 아세모글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까지 자본주의 생산체제의 다양성과 소득·고용 불평등, 자본과 노동의 민주적 사회적 관계 그리고 개인의 열망에 이르기까지 혹은 혁명적이고 혹은 개혁적이고 혹은 해부학적인 진단과 주장이 20세기 내내 이어 현재 21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제출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고전적 저작에서 대부분 제시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공백이 있다. 바로 사회경제 전체 조직이 생산적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중산층을 포함한 대중 각 개인들의 열망이 성장과 통합되는 민주적 시장, 민주적 경제질서에 대한 것이다.

    웅거는 이 원대하고 야심찬 기획을 ‘민주적이고 생산적인 실험주의’라고 부른다. 밀턴 프리드먼, 하이에크, 마르크스, 케인스도 지금 우리가 선택해야 할 진정한 대안은 아니다. 웅거는 자본과 시장의 독재로부터 누가 무엇을 해방시키며, 무엇을 어떻게 해체·분산시킬 것인지, 또 민주와 효율성의 양립을 위해 우리는 비용-편익 계산을 잘 해낼 역량이 있는지를 묻고 대답한다. 경제사회체제의 내부자와 외부자, 민족경제와 세계화, 대자본과 자영업자 등 소규모 자본 사이의 분파 갈등, 저축과 투자 그리고 통화와 국제금융까지 또 발전경제학에서 케인스주의 그리고 종속이론까지, 중심과 주변을 가로지르며 이른바 ‘경계선이 모호한 이 시대’에 진보개혁집단이 추구해야 할 실험의 윤곽을 명료하게 제시한다. 그 윤곽은 비록 놀랍지는 않지만, 매우 성찰적이고 숙고적이며 ‘소득분배 투쟁’을 넘어선 ‘포용적 정치경제적 기획’으로서 진보개혁적 21세기 자본주의 시장경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또 흥미롭다.

    신자유주의 해독제는 민주주의

    웅거는 전 세계 경제가 경제적 대중영합주의와 표준적 시장경제학의 가르침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전통적인 도그마에서 탈주하려면 기존 관념들이 방치해온 결함들을 손봐야 한다. 그 결함이란 바로 불평등, 소득 및 고용 양극화, 높은 실업 그리고 수많은 대중의 좌절과 열패감이고, 이 모든 결함의 총합이 사회적 긴장과 갈등이다.

    웅거는 이 진자 운동을 중단시키고 극복할 방법이 민주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개인들이 역량을 키울 여건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다양한 결사체들을 만들고 사회적 대안들을 내놓게 해야 한다. 전통적 주류 시장경제론에 억압되어 있는 대안적 경제사회 형태들의 가능성을 다시 구출해야 한다. 실제로 웅거의 책은 지배적인 경제사회 분석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제도들 간의 조정과 연계를 강화하거나 혹은 신축적으로 완화하는, 제도적 실험주의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상상력과 비전으로 충만한 제도적 실험주의

    이 상상력이 필요한 곳은 브라질 같은 거대 빈곤국이나 개발도상국만이 아니다. 오늘날 주요 강대국과 주요 경제체제들도 과거 열강들이 경험한 것처럼 일련의 풀지 못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변혁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현실적 문제가 둘 중 하나라고 말한다. 해결될 수 없는 문제와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 그러나 인간의 고통과 국가적 퇴행 속에서 비용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잘사는 산업민주국가라 하더라도 더 학습 친화적인 산업경제로 이행하고, 결사체적인 삶과 지속적 교육을 통해 산업경제의 기반을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생산성 향상 문제, 산업을 재구성하는 생산주의적 프로그램에 복지국가의 분배주의적인 약속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지 못하는 무능력, 계급·인종·성별의 실타래로 꼬인 노동자의 구획을 뚫고 다시 출현하는 새로운 양태의 견고한 위계적 분할, 사회에서 탈출 중이거나 사회와 불화하는 실업 상태 혹은 불안정 고용노동자라는 실질적 최하층 계급의 증가, 그리고 집단적 문제의 집단적 해결을 위해 마련한 제도에서 사무직과 현장 노동자를 포함한 광범위한 월급쟁이 중산층의 일반적 소외 문제 등 이 모든 문제가 실제로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산업민주국가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웅거는 이 문제를 풀 대안으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개인적 열망 같은 미시정치와 상호보완되어 작동하는 거시적 정치실험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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