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의 ‘삶의 양식’은 무엇일까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8)
        2018년 02월 12일 10:45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노동자, 두 개의 삶: 돈 버는 맛과 노는 맛

    대우자동차는 김우중의 세계 경영 일환으로 90년대 중반 동구권의 자동차 공장을 여러 군데 인수했다. 그런데 그 나라들의 서비스 수준이 낮아서 한국에서 직접 서비스 팀을 파견하여 자동차를 수리해 줬다. 잘 아는 동료가 그 팀으로 뽑혀 파견됐다. 부품은 한국에서 가져가지만 수리를 위해서는 현지 노동자 도움이 필요하다.

    한번은 루마니아에 갔었는데 국내팀은 다른 나라로 건너가기 위해서 루마니아 작업을 서둘러 마쳐야 했다. 현지 노동자들에게 잔업을 제안했다. 하지만 잔업에 응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족과 저녁 약속이 있어서, 축구 보러 가야 해서 등 이유도 제각각이다. 잔업수당을 올렸다. 그래도 없다. 결국 일정을 재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마니아 노동자들은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되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시간이 지나면 못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지금 해야 할 일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GM은 잔업, 특근이 많은 부서와 잔업, 특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상 근무시간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부서로 확연이 갈린다. 그래서 한국GM에는 두 부류의 노동자들로 나뉘고, 두 가지 삶의 형태가 공존한다. 내가 일하는 부서는 주중 잔업도 꽉 채우고, 토요일, 일요일까지 특근을 한다. 군산 공장을 비롯해서 다른 부서는 잔업, 특근이 없거나 1주일에 2~3일만 근무하기도 한다. 모두들 잔업, 특근이 많은 부서를 부러워하고, 지원을 가서라도 잔업, 특근을 하려고 하고 자리가 비면 서로 오려고 한다. 일이 없는 부서는 장래를 불안해하고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런데 이렇게 갈라진 두 개의 삶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이러한 질문에 당장 분개한 목소리로 반박할 것이다. 일거리가 없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떨고 있는데 무슨 행복 운운하느냐고. 일주일에 2~3일 일하는 공장이 어디 정상적인 공장이냐고.

    물론 정상은 아니다. 일거리가 없어지는 공장이 늘어나면 기업의 생존도 불투명해지는 것은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미래의 안정적 고용을 위해서 노력은 해야 하지만 여유 시간이 많은 현재의 삶을 불안과 고통으로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래 전에 한국GM 동료들은 현대와 기아를 부러워했다. 우리는 잔업, 특근이 별로 없는데 현대와 기아 노동자들은 잔업, 특근도 많고 성과급도 많아서 급여에서 많은 차이가 났었다. 그래서 ‘현대, 기아에 비하면 우리는 비정규직’이라는 불만이 쌓였다.

    그때 나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현대, 기아 노동자들이 과연 노는 맛을 알까? 그 친구들이 더 불쌍할 수도 있어.”

    주3일밖에 일이 없던 부서에서 일하던 한 동료가 너스레를 떨곤 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제일 짧아. 프랑스 노동자들 하나도 안부럽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고 GM이 파산 신청을 하면서 한국GM 전 공장의 가동률이 뚝 떨어졌다.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훨씬 많았다. 조합원들은 회사 장래를 불안해한다. 나는 그때 “지금의 휴식이 앞으로 우리 생명을 10년은 연장시킬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며 우울해하는 동료들을 달랬다. 회사 사정으로 인한 강요된 휴가일망정, 휴가는 휴가 아닌가?

    이 시기를 나는 비록 돈은 없지만 동료들과 많이 어울리고, 산에도 다니고 했던 나름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시간에 대한 부담은 없지만 술값에 대한 부담 때문에 1인당 돈 1만 원씩 걷어서 동료들과 값싼 안주로 다음 날 노동에 대한 부담 없이 술을 마셨다. 동료들은 2차를 가기보다는 당구장으로 향한다. 돈이 없는 만큼 거기에 맞는 놀이문화가 형성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당시 동료들의 입에서는 불안하다는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왔지만 얼굴 표정은 피로감이 없이 항상 밝았고, 몸은 가볍고 활기찼던 것을 기억한다.

    다시 공장은 정상 가동되기 시작하고 잔업과 특근이 늘기 시작한다. 동료들의 몸이 지쳐가는 것을 느꼈고 함께 어울릴 시간은 줄어들었다. 반면에 소비가 바뀐다. 자전거를 바꾸고, 아웃도어 복장은 고급 브랜드를 사서 입고, 차도 바꾼다. 회식 횟수는 줄어들지만 이전보다 더 비싸고 맛있는 안주를 놓고 술을 마시고 2~3차까지 간다.

    일거리가 줄면 조합원들은 두 개의 선택으로 갈린다. 첫 번째가 잔업, 특근이 많은 부서에 지원을 가거나 노가다나 부업을 해서 돈을 버는 경우다. 두 번째는 비록 잔업과 특근이 많은 부서를 부러워하더라고 현재의 여유를 편하게 즐긴다. 또한 일거리가 줄고, 수입이 줄고, 시간의 여백이 많아지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해석이 갈린다. 어떤 사람들, 특히 노동조합 간부들은 이를 비정상적이고 극심한 고통으로 묘사한다.

    “잔업과 특근이 없어서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지고, 남들 다 출근해야 하는데 출근할 곳이 없이 집에만 처박혀 있어야 한다. 혼자 낮에 돌아다니면 남들 눈에도 이상하게 보인다.”

    이러한 시간 여백의 고통을 호소하는 조합원들도 있다. “남들 다 출근하는데 방구석에만 뒹굴고 있으면 내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괴롭다.”

    그런데 꼭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줄어든 노동과 늘어난 여가 시간은 알게 모르게 노동자들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텃밭도 하고, 취미 생활도 가지고, 부부 관계도 친밀해지고, 자녀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 동료는 장기간 일거리가 없는 현실에서 자식들의 육아를 전담했다. 아이들 숙제도 봐 주고 같이 축구장도 가고, 여행도 다닌다. 아이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낸다. 가사노동도 상당 부분 담당하고 부인은 이런 남편의 도움으로 자기 계발도 하고 돈도 번다. 또 한 동료는 오랫동안 넓은 텃밭 농사를 지으면서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느낀다. 텃밭 수준을 넘어서 거의 농사꾼 수준이고 시간만 나면 텃밭에 가서 밭을 일군다. 지금은 시골에 황토집도 짓고 새로운 노후의 삶을 준비한다.

    우리 큰딸은 취준생이다. 그런데 큰딸에게는 두 개의 감정이 공존한다. 첫번째는 ‘빨리 취직해서 이 불안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희망의 감정이다. 두 번째는 ‘취직을 하면 그동안 나름 자유로웠던 생활이 끝나고 회사에 얽매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우려의 감정이다. 끔찍한 노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짜증이 난다. 그래서 ‘빨리 취업하고 싶다’는 말과 ‘취직하기 싫다’는 말이 엇갈리면서 반복된다.

    불안하지 않는 미래, 고용 안정은 우리의 중요한 목표다. 일이 없으면 회사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과연 노동자들에게 일거리만 있으면 행복한가? 노동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은 없는가? 그리고 노동에서 자유롭게 되지는 않더라고 보다 적은 노동, 노동의 굴레에 매여서 허덕대지 않는 보다 나은 삶의 질에 대한 욕망은 없는가.

    불안하다고? 하지만 항상 위기와 불안 속에 살아가는 게 노동자 인생이 아니던가? 그래서 불안에 지배당하지 않고 현재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삶의 태도는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시간의 여백을 채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키우는 것 또한 정말 중요하다. 그런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에서 미래의 고용을 지킬 수 있는 힘도 나오는 것이 아닐까.

    회사 인간: 비어 버린 나의 삶

    몇 년 전 노동조합 간부로 있을 때 주간연속 2교대제 시행을 앞두고 현장을 돌다가 한 조합원의 기습적인 질문에 정말 당황했다. “낮에 4시면 집에 들어 가는데 할 일도 없고 시간만 낭비하는 거 아닌가요” 이 조합원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낭비? 무엇이 낭비지?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낭비가 아니지? 노동하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노동을 하면 뭔가를 생산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서 가족을 부양하니까. 노동을 위해서 잠을 자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내일의 노동을 위한 재충전이니까.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고 동료들과의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술자리도 낭비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낭비일까? 나만을 위한 시간, 비어 있는 시간은 낭비다. 낮 4시에 집에 들어간다. 집에는 나만이 있다.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낭비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뒤집어 보자. 비어 있는 시간은 새로움으로 채우고, 나를 충만하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심심함은 창조의 어머니다. 심심해야 생각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낸다. 하긴 한국 사회는 어린 아이들이 심심해하고 할 일 없이 빈둥대는 것도 눈 뜨고 못 보는 사회 아닌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의미와 내용을 회사에서 찾는다. 공장에서의 노동, 동료들과 인간관계 등 낯익은 회사 생활이 삶의 거의 전부다. 그래서 그 의미와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줄기차게 회사로 간다. 회사에 와서 돈을 벌고, 회사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느낀다. 심지어 회사 쉬는 날에도 자전거를 타고 들어와 회사 한 바퀴를 돌고,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야 마음이 놓인다는 조합원도 있었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휴가 한 번 안 쓰는 조합원도 있다.

    물론 가족이 있다. 노동자들은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 때문에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장시간의 노동은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빼앗아 버린다. 내가 한 동료에게 물었다.

    “가끔은 휴일에 쉬어야 되지 않아”

    “마누라가 휴일에 집에 있는 걸 싫어해.”

    그의 대답이다. 또 이어지는 말.

    “아이들도 불편해 해.”

    돈 벌어오는 남편과 가족의 생활은 서로 엇갈린다. 같이 쉬는 방법을 만들지 못한다. 남편, 아빠의 휴식은 다음 날 노동을 위해 지친 몸을 충전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가족은 쉬고 있는 ‘가장’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자리를 비켜 준다. 남편은 집에서 쉬는 것보다 회사에 출근해서 동료들과 웃고 떠들면서 일하다가 퇴근 후에 술 마시는 것이 더 편하다. 남편과 아빠에게 가족은 부양해야 할 의무감만을 주는 존재가 되고, 남편과 아빠는 돈을 벌어다 주는 ‘현금자판기’가 되어 버린다.

    죽음마저 돈으로 계산된다. 동료들은 “죽을 거면 회사에서 죽어야 해”라고 말한다. 회사 다니다가 죽으면 조합비에서 공제해서 가족에게 목돈이 주어진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조합원이 계속 출근했다. 계단 하나하나 오르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그러다 결국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돌아가셨다. 휴직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죽음을 맞이해도 되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어쩌면 회사에 출근해서 동료들과 있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건강 강박에 빠지기도 한다. 한 조합원이 건강 이상으로 쓰러졌다. 이후 건강을 챙기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운동했다. 잔업과 특근은 빠지지 않았다.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운동도 한다. 그러다 쓰러져 돌아가셨다. 그분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적절한 휴식이었지만 과도한 노동과 건강을 위한 운동이 겹쳐지면서 피로가 누적된 것이 사망 원인이 아니었을까.

    한 조합원이 암에 걸렸다. 다행히 수술을 해서 상태가 호전됐다. 그런데 돈은 벌지 못하면서 암 치료를 하느라 많은 돈을 써서 집안 형편이 많이 나빠졌다. 그래서 어려워진 가정 경제를 메우기 위해서 출근해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암이 재발돼 사망했다. 죽음에 직면하거나 몸이 망가지면 모든 것을 자신의 몸과 삶에 집중해야 하지만 그렇게 못한다. 온전히 자기만을 위한 휴가, 자기 몸만을 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게 노동자는 ‘회사 인간’이 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역할만 있지 ‘자기’는 텅 비어 있다.

    몇 년 전 노동조합 정책실장으로 일할 때 퇴직 후 프로그램을 단체협약 요구안으로 올리고 협상한 적이 있다. 그때 회사 관계자가 말했다.

    “조합원들은 퇴직 후 프로그램보다 퇴직 후에 비정규직으로라도 더 일하기를 원한다.”

    인생 2모작이니, 제2의 인생이니 말들을 하지만, 모든 것은 돈으로 통한다. 어차피 정년 후에도 쪼그라진 인생을 살지 않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연말에 정년퇴직하고 새해 벽두부터 같은 공장의 비정규직으로 출근하는 선배 노동자 모습을 보았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혼잣말을 했다.

    “에이, 몇 달이라도 쉬시다 출근하시지. 근 40년 가까이 단 하루도 맘 편히 쉬지도 못했을 텐데.”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삶에 대한 공포, 비루한 삶에 대한 공포를 더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의학의 발달로 수명은 늘어난다. 우리는 발달된 의술 덕분으로 죽음 이전에 기나긴 노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노년의 삶은 병들고 가난하고 비루한 삶, 치매, 고독으로 채워져 있다. 아니 그렇게 채워질 것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다. 죽음을 걱정하고 직면하기에는 비루한 노년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너무 크다.

    정년퇴직을 얼마 남지 않은 형님하고 간단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형님, 정년 후에 계획이 있으세요”

    “뭐가 있겠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라인 타는 것밖에 없는데. 70까지 돈이나 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형님의 말 속에는 정년 후의 ‘비어 버린 삶’에 대한 두려움이 진하게 묻어져 나온다. 잔업, 특근 많이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정년 이후 노년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작용한다. 노후에 대한 불안은 정규직으로 일할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고, 퇴직하면 비정규직으로라도 빨리 취직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한다.

    과연 그런가? 내가 정년퇴직한 선배들을 지켜본 바로는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관계의 상실, 일상적인 삶의 의미의 상실 때문에 고통 받는다. 정년퇴직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끊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삶의 의미와 내용을 제공해 주었던 인간관계와 낯익은 일상이 끊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회사 인간으로서, 가족 부양자로서의 존재를 떠나서 ‘자기’를 채우지 못했을 때 정년퇴직은 자기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는 치명적 사건이 되어 버린다.

    회사에 다닐 동안 정말 열심히 일하신 선배 노동자가 있었다. 돈도 꽤 모았고, 자식들에게 집도 사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년퇴직을 하고 나니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같이 술 마실 친구도, 여가를 보낼 취미도 없다. 여러 군데 친목회에 다니는 활동적인 부인과 그 선배 노동자는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회사를 떠나고, 가족과의 관계도 비어 있고, 자기도 비어있는 그 선배 노동자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노동자의 현재 삶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의 삶을 어떻게 즐겁게 사느냐보다는 미래의 불행을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가 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더욱더 노동에 매이게 하고, 바로 지금 현재의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채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술 마실 돈이 필요하고, 놀러 갈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더 해야 한다. 그래서 여가를 즐기는 것 역시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가 된다. 악순환은 계속된다.

    한국GM을 비롯한 대기업 노동자들 사이에 도박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경우도 있고, 심지어 도박 빚 때문에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박에 빠져 있는 노동자들은 많다.

    왜 그럴까? 장시간 노동으로 여가 시간이 없다. 시간의 여백을 채울 수 있는 취미나 문화생활을 가지지 못한다. 그런데 돈은 있다. 짧은 시간에 짜릿한 흥분을 느끼며 보낼 수 있는 취미로는 도박만한 게 없다. 그렇게 돈은 ‘비어버린 자기를 채우는 대체물’이 된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능력, 일상의 삶의 내용을 채울 수 있는 ‘문화와 여가를 즐기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지금의 삶, 그리고 정년 이후의 삶을 채울 수 있는 것이 돈인가?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지금 현재의 삶을 노동으로 채우는 것이 맞는가? 오히려 지금의 삶, 노년 이후의 삶을 풍부하게 채울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시간의 여백, 즉 여가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돈은 삶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돈이 필요해서 시간을 쓴다고 하더라도 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부러워할 ‘삶의 양식’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기적이라고 욕을 먹는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좀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다.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가족 생계를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잔업, 특근에 매달리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신의 건강을 챙기고 풍요로운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시간을 쓰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욕심이 많은가? 나는 욕심이 너무 없어서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는 것,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에 자신의 욕망을 가두면서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자기를 계발하는 욕망을 포기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이 되는 것이 꿈이고 정규직의 삶을 부러워한다. 그런데 과연 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부러워할까? 단지 정규직이 벌어들이는 돈과 안정된 고용을 부러워 할 뿐이다.

    그래서 정규직 노동자의 꿈은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삶의 표준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벌어들이는 돈의 크기가 아니라 여가를 누리고, 문화적 삶을 향유하고,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다양하게 참여하는 풍부한 ‘삶의 형식’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가 이 정도의 삶은 살아야지’라는 ‘삶의 모범’을 만들어야 한다. 왜 노동자는 음악 감상, 미술 관람, 독서 등의 문화 생활과는 동떨어진 세상에서 살아야 하나?

    과거 소련은 볼쇼이 발레단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을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관람료를 거의 무료에 가깝게 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한 적이 있다. 지금 한국에서도 지자체의 지원으로 단돈 1만 원으로 수준 높은 음악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많다. 책을 빌려 볼 수 있는 도서관은 주변 어디든지 있고, 잘 찾아보면 유익한 인문학 강좌도 많다. 더 이상 문화와 독서가 돈이 많이 드는,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물론 노동자들이 좀 더 쉽게 문화와 책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지역 사회단체와 함께 문화와 교육 공간을 만드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기울일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문화와 책을 만나고, 노동자의 삶이 문화와 책과 버무려지면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없으면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배제된 노동자들 다수는 투표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고 일하는 경우도 많다. 여가 시간과 마음의 여유는 사회, 정치 참여의 폭을 넓힐 것이다. 또한 배제된 노동자들과 연대를 실천할 수 있는 힘과 시간을 확보할 수도 있다.

    여가라는 게 쉬는 것일 뿐인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할 수 있다. 한국GM의 경우는 일이 없어서 쉬는 일이 태반이지 않는가? 그런데 만일 주말은 반드시 쉬는 것이고, 잔업이 없는 삶을 계속 산다고 생각하자. 들쭉날쭉 쉬었다 일했다는 반복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정기적인 시간의 여백이 나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하자. 10년, 20년, 30년, 시간의 여백이 있고, 그것을 채우려는 노력들이 누적되면 삶이 바뀐다. “아휴, 노는 것도 지겨워.” 이렇게 말하지만 심심하면 창조적이 된다. 취미를 갖고, 뭔가를 배우고, 자신의 삶을 바꿀 노력을 하는 그런 ‘삶의 형식’을 만들어 낼 것이다.

    아마도 나처럼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건강 문제나 노후 삶을 설계하는 수준의 변화일 것이다. 하지만 젊은 후배들에게 그런 시간의 여백이 지속적으로 주어진다면 삶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 젊은 후배들에게 우리가 겪었던 노동에 짓눌린 삶을 물려주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내가 한국GM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세 가지 아쉬움이 있다.

    첫 번째가 주간연속 2교대제로 주어진 시간 여유를 문화와 여가 생활로 의미 있게 채울 수 있는 방안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가 오래 된 일이긴 하지만 노사가 노동자들의 여가와 문화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문화센터 건립을 합의하고도 IMF 사태로 인해 이행되지 못한 것이다. 세 번째는 단체협약에 있던 본인 대학 학자금 지원 제도가 폐지된 것이다. 이 모두가 노동자들의 시간의 여백을 채울 수 있는 문화와 여가 생활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이다.

    본인 대학 학자금 지원 제도가 있었을 때 많은 조합원들은 방송통신대학이나 사이버대학을 지원해서 자신의 역량을 키웠다. 물론 회사가 주장하듯이 비용에 대한 부담이 없으니까 일단 등록하고 제대로 과정을 이수하지 않는 경우도 생기는 등 제도가 남용된 경향이 없진 않았지만 조합원들의 자기 계발 의지를 자극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는 이 제도가 보완 장치를 전제로 다시 부활되어야 한다고 본다. 시간의 여백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그 시간은 고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래서 능력을 키워야 한다. 지역의 대학과 연계된 교양 강좌 프로그램을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문화 교양 프로그램과 다양한 서클활동의 활성화에 힘을 쏟을 필요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고? 좋은 이야기지만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나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다고 본다. 87년 이후 우리가 얻은 투쟁의 성과를 제대로 향유하면 된다. 돈과의 교환 때문에 묻혀 버리고 유보되었던 우리의 권리를 햇빛 아래 끄집어내면 된다. 노동시간도 단축되고, 주간연속 2교대제도 시행이 되고, 휴가권도 충분하지 않은가? 잔업과 특근에 매이지 않아도 조금만 절약해서 살면 여가와 여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지 않은가.

    물론 회사도 바뀌어야 한다.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에 의존하는 생산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정규직 노동자의 꿈은 돈과 소비와 노동이 접속하면서 만들어지는 ‘삶의 형식’이 아닌 여가와 문화와 삶의 질이 접속하면서 만들어지는 풍부한 ‘삶의 형식’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규직 노동자만 잘 살면 되는가? 아내가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간적인 모멸을 당하면서 일하고 있는데, 자식들이 취업 걱정에 잠못 이루고 아빠와 같은 정규직이 되는 것이 가장 큰 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고 있는데, 이 땅의 다수의 노동자들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데 과연 우리만 잘 살 수 있는가?

    나 혼자만 행복한 삶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열악한 노동조건과 일상적 고용 불안에, 정규직 노동자들은 정리 해고 불안에 시달리게 하는 자본의 분할 지배 전략 아래서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이 땅의 노동자들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

    내 자식은 비정규직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꿈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이 땅의 가난한 다수의 노동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 홀로 행복’의 불가능성을 알았다면 이제 우리는 나눔과 연대를 통해서 모든 노동자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앞 회의 글 <돈과 삶의 질, 그 ‘부등가 교환’>

    필자소개
    노동자. 한국GM 도장부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