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포자 아빠의 어떤 후회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 37] 수학
        2018년 05월 16일 09: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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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2월 28일, 오늘은 딸과 내게 참으로 우울한 날이었다. 전철에서도 딸은 침울했다.

    “다른 과목들 합친 시간만큼 수학에 집중 투여해서 공부했는데, 2등급이 나왔어. 다른 친구는 그렇게 안 하고도 나보다 10점이나 더 나왔어. 너무 속상해.”

    그러고서 딸은 말을 한동안 멈추더니, 힘겹게 이었다.

    “좌절했어. 절망했고.”

    내 가슴이 턱 막히면서 한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아이를 더 무겁게 할까 봐, 한숨이 밖으로 못 나오게 눌렀다.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난감했다. 머리가 하얬다. 끙끙대다 삼척동자도 아는 방법을 어쭙잖게 꺼냈다.

    “수학 시험 볼 때, 어려운 문제는 뒤로 빼고 쉬운 것부터 풀어 봐.”

    “당연히 그렇게 하지. 모를 것 같은 건 포기하고 집중하는 데도 그런 거야. 문제 푸는 속도가 늦어서 그래. 수학을 잘해야 된다는 강박감에 긴장을 많이 해서 아는 문제도 틀리고. 시간을 주고 풀라면 어느 정도 다 푸는데. 그러면 성취감도 있고 재미도 있는데.”

    여러 차례 들은 얘기였다. 지난번엔 낙관적이었다. 중간고사에서 점수가 높게 나와 교사에게 이과 성향이란 칭찬도 받은 뒤였다. 수학이 재미있어졌다 했고, 1등급 받겠다며 의욕도 차 있었다. 이렇게나 낙심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청소년은 이름 자체로 푸르다. 세상의 어떤 표현으로도 적확한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한 세대다. 그런 딸이 좌절, 절망이라는 극단의 부정 단어를 썼다. 묵직한 돌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요즘 시쳇말로 수포자인 내 피 탓이었다. 미안했다.

    도봉산역에 내려 등산용품점을 살피며 걸었다. 딸에겐 겨울 등산 잠바가 없었다. 용케도 불평 한마디 없이 매번 제 엄마 옷을 입고서 산행에 동행한 거였다. 두리번거리는 내 눈에 한 상점 바깥 진열대에 걸린 옷이 띄었다. 어울릴 듯해 어떠냐고 권했더니, 고개를 저었다. 옷을 고를 때마다 매번 벌어지는 가벼운 실랑이였다.

    “나는 화려한 건 싫고 단색이 좋아.”

    포기하고 걷다 어떤 상점을 가리키며 들어갈까 물었다. 청소년이 선호한다는 유명 상표였다. 딸내미한테 기분 내는 건데 비싸 봐야 얼마나 비싸겠냐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절망하고 좌절한 딸의 마음을 풀어 주고 싶었다.

    “아빠. 저긴 너무 비싸. 순전히 광고 값이야.”

    질색하며 나를 잡아끌었다. 아빠 처지 생각하는 딸의 마음 씀씀이가 아리면서도 신통했다. 다시금 걸음을 옮기다 단색 잠바가 걸린 진열대에 멈췄다. 간판도 낯설지 않았다. 딸애는 입어보고 만족했다. 카드를 꺼내 할인가 13만4,100원을 계산했다.

    “수학에 집중한 게 잘못인 것 같아.”

    산길을 오르며 딸은 전략 실패를 얘기했다. 암기 과목에 집중해서 효과를 본 나의 경험을 살려 조언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미련두지 말고, 작전을 다시 짜는 게 어때. 수학은 1등급 욕심내지 말고, 2등급에서 더 떨어지지 않게만 해. 대신 다른 과목에 집중해서 성과를 내는 거지. 그렇게 해서 종합 점수로 1점대 초반 등급을 목표로 해 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대답하는 딸아이는 맥이 풀려 있었다. 나는 다독거렸다.

    “3학년 때라도 잘하면 되지 않겠어?”

    “내신은 3학년 1학기까지 반영되는데, 1·2·3학년 반영 비율이 20·40·40이야. 30·30·40도 있고. 이렇든 저렇든 1·2학년 합친 비율이 60%고, 남은 게 40%야. 이미 늦었어.”

    먹구름이 아이를 뒤덮고 있었다. 내 마음도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겨우 입을 열고서 한마디 했다.

    “그렇다면 정시도 도전해 보는 게 어떠냐.”

    “강남 아이들과는 정시 경쟁이 안 돼. 걔네는 중학교 때부터 학원에 다니면서 정시에 맞춰 공부한다고. 걔네는 학교 과목을 미리 다 떼고, 고2 때 수능EBS 수업을 한단 말이야. 우리는 고3에 하는데. 재수생까지 가세해서 수능으론 거의 불가능 해. 영어는 2개만 틀려도 2등급으로 떨어진다고. 그러면 서울은 불가능하고 충청 이남으로 가야 한단 말이야.”

    내 가슴에서 후회의 감정이 거칠게 출렁거렸다. 입시에서 대학 서열은 공부 총량에 의해 결정되는 건데.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학원을 보내야 했나. 빚을 내서라도 강남 학원에 보내고 낮밤을 오직 공부에만 매달리게 몰아세워야 했나. 그러면서 스카이를 목표로 공부하도록 채근해야 했나. 그랬다면 전교 1,2등은 무난할 텐데. 저렇게 조바심 내며 애달아하지도 않을 텐데. 내 마음은 절벽 밑으로 추락했다. 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수시에 도전할래. 지금 등급이면 아빠가 말한 ㄹ대는 갈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서울이 아니잖아. 집에서 가까운 숙대도 갈 수 있어. 근데 그것도 싫어. 중·고등학교가 여학교인데, 대학까지 그러고 싶진 않아. 원서를 여섯 개까지 쓸 수 있으니까 원하는 대학에 도전해 볼 거야.”

    딸은 의지를 밝혔다. 정치외교학과도 고민한다 했다.

    “학교가 방과 후 학교를 강제로 시키잖아. 그래서 친구가 교육청에 고발하려고 전화를 했대. 근데 전화를 받은 장학관이 너만 피해를 볼 텐데 라고 했다는 거야. 해 봐야 소용없을 거 같아서 친구가 포기했대. 그 얘기 듣고 내가 얼마나 빡쳤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장학관이야. 정말 어이없어.”

    할매 생일에 교육정책을 바꾸려면 뭘 전공해야 되는지 묻던 질문이 즉흥적인 게 아니었다. 2주 전인 12월 14일 저녁이었다. 음력 10월 23일로 할매의 일흔 넷 생일이었다. 아이 기말고사 때문에 해방촌 가족만 단출하게 저녁을 먹었다.

    “아빠. 교육정책을 바꾸려면 뭘 전공해야 돼?”

    생일상을 차리는 중에 불현듯 물었다. 교육학이라 하려다 정치라 대답했다.

    “그럼 정치외교학과를 가야 하나?”

    딸은 혼잣말을 했다.

    한국 교육정책의 문제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불이익 당하는 사회에 원인이 있었다. 비싼 등록금에 허덕이게끔 대학을 돈벌이 수단으로 방치하는 제도에 있었다. 사지선다형 정답으로 비판의식을 잠재우는 교육정책,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자살로까지 몰아가는 사회, 그래 놓고도 비정규직과 청년 실업의 늪에 빠뜨리는 사회, 이 모든 건 사람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극단의 경쟁 체제 때문이었다. 소수의 무한 탐욕을 위한 법과 제도 때문이었다.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은 정치였다. 딸이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교육학이라 했을 터였다. 쓸데없이 정치라 했나 싶어 심사가 복잡했다. 이의를 달진 않았다.

    ‘아이는 자기주도학습을 했어. 혼자 공부하다시피 해서 이 정도면 뭘 못 하겠어. 잘 놀며 다양한 경험을 했고, 친구도 많고, 나름대로 세상을 해석할 줄 알잖아. 불의에 분노할 줄도 알고. 무얼 하든 분명 대기만성할 거야.’

    나를 암울하게 옥죄고 있던 후회의 감정을 짓밟으며 마음을 움켜잡았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무게는 심리학과에 두고, 정치외교학과도 남겨 둬. 또 생각나는 뭔가가 있으면 그것도 염두에 두고. 근데 생각날 때마다 고민하지 말고, 시험을 치른 뒤에 최종 판단하자.”

    “알았어. 남은 기간 열심히 할게.”

    “암, 그래야지. 훌륭해. 근데 그러려면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흐~, 그래야지.”

    딸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요령을 일러줬다.

    “뭘 안 하려고 결심할 때, 예를 들면 술 끊을 때, 술 끊는다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마시고 싶어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심리적 문제지. 버리려는 술이 아니라, 술을 버림으로써 얻으려는 무언가를 집중해서 생각해야 하지. 그래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 그것처럼 대학에 가겠다는 목표에 집중하면 인터넷을 덜 볼 수 있을 거야.”

    까마귀 정령이 눈 덮인 포대능선 하늘을 힘차게 날면서 딸을 격려했다.

    신선대에 올랐다.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등산객에게 부탁해 자운봉을 배경으로 아이와 사진을 찍었다. 딸의 표정이 맑고 밝아졌다. 산길을 오르며 맺힌 응어리를 털어놓고, 흰 눈을 밟고, 험한 구간에선 온힘을 기울여 산의 정기도 받고, 그러면서 후련해진 듯싶었다. 오늘도 산의 정령들에게 감사했다.

    돌아오는 전철에서도 아이 얼굴은 평온했다. 아이는 휴대폰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편안히 받칠 수 있도록 상체를 기울였다. 머릿결을 살포시 쓰다듬었다.

    필자소개
    전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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