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태죄 위헌 여부 공개변론
    법무부, 노골적 남성 중심적 사고 드러내
    임신·출산 인해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 몰인식 드러나
        2018년 05월 24일 04: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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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소원 공개변론이 있는 24일 법무부가 여성에 대해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은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폄훼하는 변론요지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임신·출산·양육으로 여성이 겪는 신체·사회적 변화와 차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낙태의 책임을 온전히 여성에게만 전가하는 전근대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분노가 쏟아지고 있다.

    <노컷뉴스>가 23일 입수해 보도한 법무부의 변론요지서는 임신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전가하면서,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차별 등을 부차적인 문제로 판단하는 내용 등을 중심으로 한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관련 논란을 ‘생명권 vs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 전제하고, 여성을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은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폄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시각은 “통상 임신은 남녀 성교에 따라 이뤄지는 것으로, 강간 등의 사유를 제외한 자의에 의한 성교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라는 문장에서도 드러난다.

    법무부는 또 임신과 출산, 나아가 양육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현실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입장을 변론서에 담았다.

    법무부는 임신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변화”라고 하면서,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사회에서 여성이 겪게 되는 차별은 “낙태죄에 따른 별개의 간접효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법무부는 낙태죄 폐지 요구를 마약 합법화 상황과 비교해 설명하기도 했다. “법으로 임신 중절을 금지하는 경우 임부의 사망률이 증가하므로 여성의 건강권을 침해한다”는 낙태죄 폐지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법무부는 “네덜란드처럼 대마를 합법화하지 않으면 더 중독성이 강한 화학 물질로 이뤄진 마약에 수요가 몰려 결국 인간의 생명과 신체에 더 위해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주장”이라고 했다.

    법무부의 이러한 변론요지서는 다른 정부 부처의 입장과도 상반된다. 여성가족부는 최근 ‘낙태죄 재검토’를 명시한 의견서를 헌재에 제출했다.

    청와대 역시 지난해 말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해 “현행 법제는 (낙태죄에 대한)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 있다”며 “여성의 자기결정권 외에 불법 임신중절 수술 과정에서 여성의 생명권, 여성의 건강권 침해 가능성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진성 헌법재판소 소장 역시 지난해 인사청문회에서 “태아의 생명권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는 사람인 임신한 여성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낙태를 선택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을 태아의 생명과 충돌하는 가치로만 볼 것이 아니다”며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했듯이 일정한 기간 이내에는 낙태를 허용하는 방향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정의당 여성당당 선거대책위원회는 24일 오후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무부는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낙태가 허용될 시 사실상 대부분의 낙태를 허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므로 부당하다고 하는데, 왜 국가와 남성은 이 책임에서 배제되는가. 이 물음에 명확한 답변을 내놓기 바란다”고 비판했다.

    정의당 서울시장 선거대책본부도 이날 “‘사람이 먼저다’에 여성은 언제까지 삭제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냈다. 선대본은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박근혜가 임명한 장관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몇 년간 눈과 귀를 막고 다른 시공간에서 살다온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청와대는 이러한 의견서를 제출한 법무부장관에 대해 즉각 해명과 그에 응당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SNS상에서도 법무부의 이 같은 변론요지서에 대해 “법 앞에 만민이 평등해야 하는데, 정작 법무부가 이토록 철저히 남성중심적이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퇴행적인 주장…이쯤 되면 국가가 나서서 국가에 대한 기대를 접어달라고 외치는 꼴” 등 법무부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드러내는 게시글이 올라오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 청원게시판엔 ‘낙태죄 폐지에 반대 의견을 개진한 법무부에 책임을 물어 박상기 법무부장관 경질을 요구합니다’, ‘낙태죄 헌법소원 관련 법무부 제출 의견 전면 철회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합니다’ 등 법무부의 책임을 묻는 청원글 다수 올라오는 등 여론의 분노는 쉽게 잦아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법무부는 23일 낸 해명자료에서 “성교는 기본적으로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적절한 피임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항상 임신 가능성이 있음에도 청구인은 임신에 대해 ‘원치 않는 부당한 부담’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며 “법무부는 이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기 위해 위와 같이 설시한 것일 뿐 낙태를 원하는 여성을 무책임한 여성으로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했다.

    또한 “낙태 허용이 여성이 임신으로 인해 겪게 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낙태 허용 시 오히려 더 큰 사회적 병리 현상(낙태율 급증, 여성의 신체적·정신적 건강 훼손, 생명경시 풍조 확산 등)이 초래될 수 있고, 임신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는 양육지원 확충, 한부모 가족 정책 강화, 사교육비 경감, 가정친화적 직장문화 조성 등 사회 상황의 개선을 통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고 밝혔다.

    여성단체 등이 모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24일 오전 11시 헌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적 흐름에서 퇴행하지 않는 제대로 된 위헌 판결을 내리라”며 헌재에 낙태죄 폐지를 촉구했다.

    현행 형법은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여성의 낙태를 도운 의사도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하고 있다. 앞서 헌재는 2012년 낙태죄에 대해 헌법 재판관 4대4의견으로 합헌 판단을 내린 바 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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