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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국경 없는 자본》(브룩 해링턴/ 김영선 옮김/ 동녘)
        2018년 05월 26일 11: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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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외 탈세, 조세 회피, 상속세 포탈….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뉴스거리다. 2016년 세상을 놀라게 했던 파나마 페이퍼스 이후 2017년 말 ‘파라다이스 페이퍼스’가 다시 한 번 폭로되면서 세금 회피 문제에 경종이 울렸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가 공개한 파라다이스 페이퍼스에 232명의 한국인이 연루되어 있으며, 현대상사, 효성, 한국가스공사 등 대기업과 공기업들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갑질 역시 대한항공의 역외 탈세, 조양호 회장의 상속세 포탈 의혹으로 번지고 있다. 전 세계 부자들의 이러한 조세 회피 행태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법망을 빠져 나가는지 알지 못한다.

    “놀러갔다가 만들었다.” 2013년부터 조세도피를 취재해온 뉴스타파가 보도한 한 기사의 헤드라인이다. 뉴스타파가 인터뷰한 부자들은 큰 힘 들이지 않고, “여행 갔다가 한번 해볼까 해서” 역외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다고 했다. 역외에 회사를 세우는 것이 이토록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이유는 배후에 그들을 돕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력이야말로 한번 형성된 불평등을 영속화하고 확대하는 전문가다. 《국경 없는 자본》은 부자 뒤에서 자본의 국제적 이동을 돕고 관리하는 사람들, 즉 ‘자산관리사’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 브룩 해링턴은 자산관리사들의 세계와 그들의 활동을 연구하기 위해 직접 2년간의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자산관리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18개국의 자산관리사들과 65차례 인터뷰를 진행하며 자산관리사만 8년에 걸쳐 연구했다. 철저한 질적 연구에 기반한 저자의 수확은 놀라울 만치 치밀하다.

    저자는 1장과 2장에서 어떻게 자산관리가 직업으로서 자리를 잡았는지 그 역사부터, 자산관리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짚어본다. 3장에서는 자산관리사가 부자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경로와 메커니즘을 파헤치며, 4장에서는 어떤 전략과 기법을 통해 부자들과 그들의 돈을 보호하는지 밝힌다. 5장에서는 자산관리사가 하는 일이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음을 증명한다. 6장에서 자산관리사와 국가의 관계를 검토함으로써, 마지막 장에서 국가에 유리한 방향으로 자산관리사를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핀다.

    이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금 회피, 불평등 문제를 다룰 때 언론과 정부는 부자와 과세제도, 공공 정책에 초점을 맞춰왔다. 확실히 이들은 중요한 요인이다. 하지만 제도, 정치, 자본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산관리사’라는 환원할 수 없는 요소가 여전히 남는다. 이들의 목표는 자신들의 존재뿐 아니라 고객(부자)과 고객의 자산을 대중의 시야에서 지우는 것이다.

    《국경 없는 자본》은 이렇게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던 사람들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며 독자가 이들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부자들이 정당한 몫의 세금을 내고 법규에 따르도록 하고 싶다면 부유한 개인이 아닌, 그들에게 봉사하는 대리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불평등에 새로운 접근법을 취하다

    저자는 자산관리사의 실체뿐 아니라 또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더 잘 알려진 계층화인 ‘소득 불평등’보다 ‘재산 불평등’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이뤄진 연구의 흐름은 거의 소득 분석에 집중돼 있다. 작년 말 발표된 <세계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불평등이 더욱 심해져 이제는 상위 1%가 아닌, 상위 0.1%의 슈퍼 리치가 하위 50%와 맞먹는 부를 가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연구 결과에서 말하는 부 역시 국가가 벌어들인 ‘소득’을 뜻한다. 저자는 둘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기에 소득 불평등보다 재산 불평등이 중요하다고 한 걸까?

    재산은 소득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오래가는 사회경제적 배열 형태다. 소득은 상여금, 불로소득, 실업, 세금 등으로 달라질 수 있지만, 재산은 한 사람이 모든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채무·세금 등의 의무를 이행한 다음 남아 있는 잉여자산을 말한다. 즉, 소득이 자산의 흐름이라면 재산은 자산의 축적분이다. 소득이 단기적이라면 재산은 장기적으로 우리의 교육 기회, 취업 시장에서의 기회 등에 영향을 미쳐 구조 내 우리의 위치를 결정한다. 또한, 재산이 소득을 발생시키기는 쉬운 반면 소득이 재산을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저자는 미국의 실례를 들어 이를 설명한다.

    미국의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자료에 따르면, 최상위 1퍼센트 소득자의 매년 평균 소득은 138만 달러다. 하지만 이 집단을 실로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재산(순자산)이 한 가정당 평균 1645만 달러로, 한 자릿수 이상 그들의 소득을 초과한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중위의 미국 가정은 약 6만 4000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한다. 이는 중위 소득 5만 3000달러보다 약간 더 많고, 지난 50년 사이 다른 어느 시점에 측정한 중위 가정의 재산보다도 더 적다. 신중한 저축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 증거는 1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의 재산 출처가 다른 데 있음을 말해준다. (213 페이지)

    앞의 실례가 암시하는 것처럼, 소득을 저축해서 재산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재산의 출처는 보통 세습, 즉 부모에게서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다. 저자는 재산의 세습은 자력이 아니라 자산관리사의 개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자산관리사가 능숙한 솜씨로 적절한 세금 우대 조치를 찾아 역외로 자본을 빼돌리거나 신탁을 만들어 상속세를 피하도록 함으로써 고객의 재산을 그대로 자손에게 이전시키기 때문이다. 세습은 자본의 흐름을 고정시킬 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정치적 권력마저 고정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부자 3대 못 간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그야말로 옛말이다.

    자산관리사가 얼마나 불평등 문제에 기여하고 있는지 정량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국가의 세수를 줄이고, 부의 재분배를 막음으로써 재산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음은 명백하다. 이렇게 중대한 역할을 하는 자산관리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부족한 것은 비관적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세습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기제를 믿고 있다. 자산관리사가 부자들의 재산 규모와 소유권을 불투명하게 만들면서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할 때다.

    슈퍼 리치의 탈세를 막기 위해 자산관리사를 역으로 이용하라!

    저자는 자산관리사의 미래가 여전히 밝다고 말한다. 자산관리사가 고객의 자산을 매우 성공적으로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인터뷰한 자산관리사들 역시 부자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자산관리업의 성장 전망을 낙관한다고 했다. 탈세를 방지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규제가 늘어나도 자산관리사들은 한층 더한 전략을 세워 즉시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재산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결국 파국에 치달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자산관리사는 슈퍼리치의 자산을 지키는 일을 하지 않고도 번창할 수 있다. ‘초국가적 금융 방식’이 저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방향이다. 세계화에 따라 외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매년 대략 2.5퍼센트씩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이 고액 순자산을 보유한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을 고용하는 고용주들은 복잡한 국제 지불 방식을 관리할 전문가가 필요하게 된다. 실제로 저자가 인터뷰한 자산관리사 폴은 국제적인 기업을 위한 연금 계획과 급여 지불 계획을 함께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자산관리 기술을, 부자 고객을 위한 개인 서비스에서 기업을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로 돌리는 것이다.

    이때 정책 입안자들의 역할은 국제적인 급여 지불 계획 등이 부자를 돕는 일보다 더 매력적인 사업 원천이 되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자산관리사가 보유한 높은 수준의 법적·금융적 전문성이 국가에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되도록 독려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자산관리 전문가를 통해 도리어 탈세와 불법행위를 단속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전한다. 고객과 자산관리사의 관계를 약화시키고, 국가와 자산관리사의 관계를 긴밀히 함으로써 말이다. 자산관리업의 성장이 불가피하다면, 자산관리사를 무조건 규제하기보다 그들의 뛰어난 기술을 역으로 국가를 위해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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