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한 장에 담긴 전쟁의 상처
    [역사의 한 페이지] 한국전쟁과 어떤 육상대회
        2018년 06월 21일 10:56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박건호 선생의 칼럼 ‘역사의 한 페이지’ 연재를 새로 시작한다. 박건호 선생은 밀양 출신으로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나왔고 명덕외고의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강남대성학원에서 근무하는 역사강사이다. 한국전쟁이 있었던 6월이어서 관련 글을 먼저 몇 차례 연재한다.<편집자>
    —————

    전쟁이 거칠게 사람들의 삶을 찢고 지나간다. 깊은 생채기를 남긴다. 그런데 전쟁이 삶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는 없다. 전쟁 중에도 인간의 삶은 영위되고 그 속에서도 희로애락이 새롭게 잉태된다. 전란 때문에 기존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기도 하지만 피난지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인연을 맺기도 한다. 어차피 삶 자체가 전쟁 아니던가.

    전쟁은 역설적이게도 파괴 위에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몽골 침략 때 황룡사가 소실되면서 황룡사 9층 목탑이 사라졌지만, 동시에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판이라는 새로운 문화유산이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이전에 수집한 사진 중에 특이한 사진이 있다. 어느 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찍은 육상대회 우승 기념사진이다. 그런데 사진에 적힌 연도가 단기 4285년 7월 13일이다. 단기 4285년은 서기로 1952년이니 6.25 전쟁 중에 찍은 것이다. 전쟁 중 그 아비규환의 시절에 육상대회가 열렸고 그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하 필자 소장 사진

    그런데 전쟁 중 육상 경기라…..

    쉽게 매치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육상 경기를 한 곳도 전선과 비교적 근접한 지역이었다니 더더욱…내가 사진을 수집한 이유는 이 ‘전쟁 중의 평화로운 일상’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이제 사진을 들여다보자.

    학교 현관 앞에 학생과 선생님들이 함께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교사 수는 20명이고, 학생 수는 14명이다. 이 학생들은 이 학교의 육상선수로 보인다. 이 학교는 무슨 학교일까? 일단 사진 아래쪽에 “영동학도 육상경기대회 우승기념”이라고 쓴 것을 보아서 강원도 지역의 학교임을 알 수 있다. 영동(嶺東)은 강원도 대관령 동쪽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다. 지금의 강원도 속초시, 강릉시, 동해시, 삼척시와 양양군 일대를 포함한다.

    그런데 학교 현관 위에 흰색 종이로 붙여놓은 글귀가 보인다. “軍警援護 强調月間(군경원호 강조월간)”을 가운데로 두고 왼쪽에 ‘三0’, 그리고 오른쪽에 ‘工高(공고)’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학교 이름은 ‘삼0공고’이다. 영동지역에 ‘삼’자로 시작하는 도시로는 삼척 말고는 특별한 도시가 없고, 게다가 학생들의 운동복 가운데에 새겨진 ‘학교 마크’를 검색해보니 삼척공고의 마크와 일치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진은 1952년 7월 강원도 지역 학생들의 육상경기 대회에 출전해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그 학교 교사들과 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전쟁 중 어떤 상황에서 육상경기가 열릴 수 있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삼척공고 마크의 변화. 625 전쟁 때는 오른쪽 것을 사용했다

    6.25 전쟁 중 이 삼척 일대의 상황부터 살피는 것이 순서겠다.

    삼척은 북한과 가까운 지역이었지만 6.25 전쟁 중 대규모 전투는 다행히 비껴갔다. 전쟁이 발발한 초기에 삼척에 주둔하던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인민군을 막기 위해 강릉으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던지 이 부대는 곧장 제천으로 후퇴하고 인민군은 삼척에 무혈 입성하였다. 1950년 7월 1일이었다. 이때 삼척공고도 인민군이 접수하여 야전병원으로 쓰였다. 삼척공고 학생들 중 일부는 피난을 갔고, 일부는 학도의용군으로 자원한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또 일부는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인민군에 편입되었을 것이고, 학교 역시 공식적으로는 휴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삼척에서 전쟁을 겪었던 이의 증언에 따르면 “나머지의 학생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산에 올라가 공부를 하였다. 당시에는 대학에 진학을 하면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삼척의 6.25전쟁이야기] 중 김원우 증언) 잘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전쟁 중에도 학업을 계속 이어가는 학생들도 다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전쟁도 학생들의 학업 의지를 꺾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기를 몇 달이 지나 계절이 바뀌고 가을이 되었다.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완전히 전세가 역전되었다. 국군의 북진이 시작되면서 9월 30일 강릉과 울진, 삼척이 수복되었다. 그러나 국군의 빠른 북진으로 남한에 고립된 인민군의 잔여 병력은 동해안 산악지대 일대를 따라 북상하면서 이 때 삼척, 강릉, 주문진의 경찰서와 관공서가 방화되고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압록강까지 북상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으며(1.4 후퇴), 이때 동해안은 삼척 위인 강릉을 전선으로 하여 국군은 북한군·중국군과 교전을 벌이게 된다. 이후 전선은 다시 북상하면서 강릉은 1951년 3월 22일, 주문진은 4월 4일 재탈환되었다. 그러므로 강릉 밑에 있는 삼척은 1.4 후퇴 당시에는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고, 큰 전투도 없었다. 삼척 사람들은 6.25전쟁 중 큰 전화를 비켜간 것을 두고 해신을 잘 모셔서 그런 것이라고들 입을 모았다.

    다시 사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위에서 언급한 대로 삼척이 인민군 치하에 있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50년 7월 1일부터 9월 29일까지의 석 달 정도였다. 게다가 1.4 후퇴 이후의 전선도 위쪽인 강릉 쪽에서 형성되었을 뿐 삼척까지는 인민군과 중공군이 남하하지 못했다. 또한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전투는 오늘날 우리가 휴전선이라고 부르는 그 지역 일대에서만 고지전 형태로 지리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뿐 그 이외의 지역은 전쟁이 끝난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1952년 7월의 영동지역 학생들의 육상대회는 이런 상황에서 열렸던 것이다. 1952년 7월이면, 전쟁이 시작된 지 거의 2년이 지났고, 휴전회담이 시작된 지도 1년이 지난 시점이므로 이미 전쟁의 이야기는 라디오에서나 들려오는 먼 곳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아마 가끔씩은 멀리서 고지전의 포성도 들려왔을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삼척공고 학생들은 강원도 지역 학생들의 육상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하였고, 그것을 기념하고자 1952년 7월 13일 학교 현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다.

    사진 뒷면에 ‘영동지구 올림피아 대회 때 우승을 획득하면서’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당시 달력을 보니 52년 7월 13일은 일요일이었다. 기념사진에는 이날 이 학교 교사들이 모두 다 출근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크지 않은 학교에 교사 20명 정도면 그렇지 않겠는가? 왜 일요일에 거의 모든 교사가 출근했을까? 사진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이 사진의 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인물이 교장선생님으로 보이는데 주변 교사들에 비해 나이가 제일 많이 들어 보일 뿐만 아니라 앉은 자리가 정중앙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그 자리가 제일 상석이었다. 교장선생님의 이름은 삼척공고의 연혁을 확인해보니 1950년부터 1954년 4월까지 재직한 심호열 선생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뒷줄 가운데 앉은 이가 심호열 교장. 교장 앞에 앉은 학생이 주장. 마크가 다른 학생과 다르다

    학생들은 흰색의 운동복, 흰색의 운동화에 검정색 교모를 쓴 모습이다. 이게 당시 경기에 참여한 학생들의 유니폼인 것이다. 흰색의 운동복 상의에는 삼척공고의 마크가 새겨져있다. 그런데 가운데 앉은 학생만 유일하게 삼척공고 마크 옆에 3줄의 선을 따로 새겼다. 위치상으로보나 그 마크의 특이함으로 보나 그가 육상부 주장이었을 것이다.

    교사들의 복장은 대부분 양복이다. 유일한 여교사 한 명은 한복을 입고 있다. 그런데 남자 교사 중 양복 대신 짙은 색 점퍼를 입은 교사가 둘 보인다. 제일 뒤쪽 오른쪽에서 세 번째와 가운데 줄 왼쪽에서 네 번째 인물이다. 둘 다 안경을 썼다. 그런데 제일 뒤쪽 오른쪽의 인물은 선글라스이다. 주로 야외에서 활동을 많이 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인물이 육상부를 지도했던 체육교사로 추정된다. 그러나 육상부 지도교사로서의 기념사진 위치로는 다소 학생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 어색하다. 위치상으로는 육상선수들과 가장 밀착해있고 반쯤 무릎을 꿇고 같이 앉아있는 인물이 지도교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또한 가장 젊어 보인다.

    이 사진 속에는 전쟁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구호들과 포스터도 있다. 현관 바로 위에 크게 “軍警援護 强調月間(군경원호 강조월간)”이라는 글이 붙어있다. 또한 현관의 오른쪽 기둥 벽에는 포스터가 하나 붙어있는데 거기에는 “군경원호 강조기간 6월 1일∼6월 30일”라는 표어와 “회비납부기간 6월 1일∼30일, 군경원호회비 납부는 후방국민의 의무입니다.”라는 글이 들어간 포스터가 희미하게 보인다.

    ‘군경원호’는 무슨 뜻일까?

    6.25 전쟁은 다수의 상이군경(傷痍軍警)을 배출하였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정부의 보호와 부양 의지는 매우 박약하였다. 재정 부족 문제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1951년 5월 대한상이용사회, 51년 11월 대한군인유족회 등의 단체가 결성되었지만 상이군경들과 유족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는 활동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느닷없이 닥친 전쟁에 나가 몸을 다친 군인들에게 국가의 도움은 절실했지만, 국가는 그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상이군인들은 거리로 나서 직접 자구책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정은용의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에서는 그들의 비참한 삶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양쪽 다리를 잃은 사람은 동료의 등에 업혀서, 한쪽 다리나 팔을 절단 당했거나 눈을 잃은 사람은 비참한 모습 그대로 제 발로 걸어서 관공서나 은행 등에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가져간 물건을 사주기를 강요하거나 용돈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술에 만취한 자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싸움판을 벌이는가 하면 길 가는 사람에게 희롱과 시비를 걸기도 해서 치안 부재 지대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몸을 다쳐 울분과 비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을 인근 주민들은 감사와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불안과 불편을 참았고 이들 앞에서는 법도 그 기능을 멈추고 있었다.”

    위는 1951년 상이용사 전역식(국가기록원) 아래는 상이용사의 모습(사진=이경모)

    백선엽의 회고록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그는 1952년 가을 어느 날 상이군인들이 대책을 요구하면서 부산역을 점거했을 때 직접 거기에 가서 그들을 설득해 해산시킨 사실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상이군인들은 거칠었다. 전쟁터에서 몸의 일부를 잃고 길이 막막해져 마음마저 찢겨있던 그들이었다. 그러니 불만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그 정도가 어느 누구보다도 격렬했다… 길거리를 떠도는 상이용사들의 불만도 문제였다. 생계 대책이 별로 없는 수많은 상이용사가 전국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무임승차는 물론이고, 식당에 들어가 소란을 피우며 공짜로 음식을 먹는 무전취식은 아주 흔했다. 아예 위협을 하면서 구걸 행위를 벌이는 상이용사들도 점차 눈에 많이 띄기 시작했다.”

    이런 상이군경을 돕기 위하여 정부는 1952년 6월을 ‘군경원호 강조기간’으로 정하여 관공서나 국내 중요기업체나 학교 등 공공기관에 군경원호사업에 적극 참여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시책에 따라 군경원호성금 걷기, 상인군경과 유가족에 대한 직업보도의 강화, 국공립 병원 및 보건진료소의 무료진료 등이 추진되었다. ‘군경원호의 노래’라는 것도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그 노래 가사는 이러하였다.

    (1절) 아들은 일선군경 우리의 용사
    구름떼 달려가듯 쌈터로 가고
    아버지 혼자 남아 도롱옷을 입고
    아들이 하던 농사 맡아하시네

    (2절) 아들을 보내놓고 혼자 남아서
    터밭에서 김매는 늙은 어머니
    그 아들 그 얼굴도 모두 잊고서
    오늘은 신명 앞에 승리를 비네.

    (후렴)

    이 나라 위한 그 정성 거룩한 그 마음
    그를 도와주게 다같이
    그를 도와주세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들의 상인군경에 대한 이해와 협조 부족으로 사업이 원활히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 사진을 찍은 것이 52년 7월 13일이었으니 군경원호 강조기간이 끝나고도 거의 보름이 지난 시점이다.

    이 사진 속의 낡은 표어와 포스터에는 상이군경들의 비참한 삶과 생존권을 요구하는 목소리, 그들을 돕자는 정부의 구호 등이 뒤엉켜 전쟁의 상처를 증언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들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사진 속에는 군경원호포스터·표어와 함께 전쟁의 상처를 말없이 증언하는 것이 또 있다.

    깨진 유리창!

    잘 보면 현관 왼쪽 교실인지 교무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곳의 유리창이 세 장이나 깨져 있다. 다른 창들과 비교해보면 원래 유리창이 아니라 나무합판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창문이었을 수도 있다. 인민군이 삼척을 점령한 시기에 부서진 것일 텐데 여전히 수리하지 않은 채 쓰고 있다. 그걸 고칠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까? 아니면 고쳐봐야 또 부서질지 모르니 일단 두고 보자는 불안감이었까? 이 깨진 유리창에서 전쟁의 파괴성과 전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불안감까지 읽는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삼척공고 육상선수들이 우승 기념사진을 찍은 시기와 비슷한 1952년 영주중학교 졸업사진. 사진에서 학교가 폭격으로 페허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