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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말모이'와 이극로
    월북 이유로 복권 안돼, 재조명 필요
        2019년 01월 15일 12: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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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말모이>가 화제를 모으며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개봉 5일 만에 120만 명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맨 상단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의 추세라면 새해 첫 천만 관객을 기록하는 우리 영화가 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 영화는 흥행요소에 필요한 몇 가지 안전장치를 가지고 출발했다. 우선 엄유나 감독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엄유나 감독에게 <말모이>는 첫 상업영화지만 그녀가 각본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왔다는 점이다. 광주항쟁 당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각본이 엄유나 감독에게서 탄생했다. 천만 각본가에서 천만 감독에 도전하는 셈이다.

    또 하나는 주제 그 자체에 있다. 최근 흥행한 한국영화는 두 종류로 양분됐다. (정치를 곁들인) 폭력영화이거나 역사물이었다. 역사물로는 <암살>과 <밀정>이 대표적인 예다. 전자는 천이백만 명을, 후자도 칠백오십만 명이 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라는 것과 일제시대가 배경이라는 것도 흥행의 장점으로 작용했다. 논픽션과 픽션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하는 것만 남게 된다. 감독이 뛰어난 각본가라는 것에서 더 이상 필요한 조합은 남아있지 않다. 유해진과 윤계상의 뛰어난 연기력이 오히려 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른쪽이 이극로

    영화는 1941년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일제가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자 급속히 우리말들이 기억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글학자들은 우리말을 하나로 모아 사전을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조선어학회를 결성했다. 말모이가 바로 우리말사전인 것이다. 영화 속 윤계상이 분한 조선어학회 대표가 이극로(1893~1978)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십 명이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2명이 재판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해방 이튿날 감옥에서 나온 이극로는 들것에 실려서야 겨우 햇빛을 볼 수 있었다.

    1910년 한일병탄이 일어나자 서간도로 망명한 이극로는 민족주의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이 세운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이극로는 한인 망명객들이 흔히 중국대학에 입학하는 것과 달리 독일인이 세운 동제대학에 입학했다. 자신이 입문한 대종교의 추천도 있었지만 ‘독일대학’이라는 것이 이 한글학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동제대학을 졸업했지만 이극로의 갈증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기회는 우연한 곳에서 찾아왔다.

    이집트까지 갔던 이동휘와의 멀고 먼 여정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당수인 이동휘와 오른팔인 박진순은 이르쿠츠크(모스크바로 변경)에서 개최되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대회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몽골을 가로질러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을 거쳐 이르쿠츠크로 가는 손쉬운 방법이 있었지만 문제는 안전이었다. 직전에 터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무력 대결로 수십 명(수백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의 한인들이 죽음을 당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르쿠츠크파는 군사권 장악에만 골몰한 상해파의 박일리아 때문에 발생한 참극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게다가 전투를 지시하고 정작 자신은 탈출해 버린 박일리아에 대해서도 시베리아에 적색수배령을 내렸다. 상해파 이동휘는 억울하다는 입장이었지만 목숨이 오가는 문제였다.

    이동휘는 바닷길을 이용해 독일을 거쳐 모스크바로 이동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대회를 주도하는 것이 이르쿠츠크파라는 것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지만 안전이 우선이었다. 어차피 늦은 이상 안전한 경로를 선택해 극동민족대회 이후에 열리는 코민테른 회의에서 상해파가 유일당이 되어야 한다는 우회전략을 계획했다. 독일공산당의 측면지원도 필요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영어나 러시아가 아니라 독일어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동휘는 이극로에게 통역을 도와주면 독일 유학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이극로는 당장 짐을 꾸렸다.

    상해에서 유럽으로 가는 직항편은 기착지가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였다. 계획대로라면 마르세이유에서 내려 리옹을 거쳐 국경인 바젤을 지나 독일 서남부, 즉 하이델베르크 방면으로 이동하는 경로였다. 여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상해를 지나 첫 번째 기착지에 도착하자 일제는 배를 급습해 이동휘의 체포를 시도했다. 체포를 막아선 것은 선장이었다. 이때의 기선은 엄연한 치외법권지역이므로 선장은 프랑스의 동의서를 요구하며 배에서 내릴 것을 주문했다.

    일제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번째 기착지에서는 프랑스 경찰을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다. 선장은 이번에도 경찰이 아니라 공식문서를 요청했다. 일제가 공식문서를 만들려고 하는 사이 선장은 배를 출발시켰다. 정해진 시간에 출발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유를 내세웠다. 이동휘는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선장도 고민이 있었다. 이들을 이제 프랑스 영토에 내려주는 것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선장은 마지막 기항지인 이집트에 일행들을 내려줬다. 이극로는 이 소동 속에 정장을 입은 한인 청년과 말을 주고받았다. 영국으로 유학을 가는 훗날의 대통령 윤보선이었다.

    카이로에 도착한 이동휘 일행은 느긋하게 피라미드를 구경하는 자유를 누렸다. 이전에도 피라미드를 먼저 본 한인(조선인)이 분명 있었겠지만 기록상에 남겨진 사람 중에 피라미드를 처음으로 본 것은 이들이었다. 불굴의 군인 출신인 이동휘는 이런 변수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즐기면서 새로운 기회로 삼는 스타일이었다. 카이로에서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지중해를 배를 타고 이탈리아 나폴리에 도착했다. 다시 로마에 도착해 며칠간 머물렀다.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동휘 성격에 바티칸도 보았을 것은 분명했다, 밀라노를 지나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의 제네바와 베른을 거쳐 마침내 독일과 국경인 바젤에 도착했다. 일제시대 3인의 유럽 배낭여행이 되어 버렸다.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이동휘 일행은 오늘날 헤센주의 프랑쿠프루트에 며칠간 머물렀다. 기차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뷔르츠부르크에 상해파의 독일 포스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해파는 독일과 유럽 등에 비밀당원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정세를 보고 받아왔던 것이다. 뷔르츠부르크의 김모씨가 바로 그런 인물 중의 하나였다. 최근 정세를 어느 정도 파악한 이동휘는 곧바로 베를린으로 들어가 독일공산당과 접선했다. 예상대로 독일에서 러시아로 들어가는 이동휘의 입국 요청은 거부되었다. 독일공산당 대표단이 나서야 입국요청이 해결되었다. 만약을 대비해 대표단의 1인이 이동휘와 모스크바까지 동행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통역을 다 마친 이극로는 이동휘의 주선으로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훔볼트대학)을 입학해 박사를 마치고 영국과 미국을 거쳐 국내로 들어온 것은 상해를 떠난 지 8년만이었다. 경제학 박사 이극로는 귀국한 직후부터 한글 연구에 몰두했다. 그 일환으로 조선어학회 설립을 주도하고 간사장에 취임했다. 조선어학회는 맞춤법과 늘어나고 있는 외래어 표기법을 통일하는데 주력했다. 무엇보다 우리말을 살린 (조선)한글사전을 편찬하는 것이 핵심과제였다. 그 결과 ‘조선말큰사전’이 탄생했다. 순탄했던 이들의 활동은 일제가 우리말 사용 자체를 금지하면서 단체가 불법화되었다. 하지만 이들을 비밀리에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그 대가는 감옥과 고문이었다.

    해방 후 조봉암 주도한 독립전선에 참여한 이극로
    그의 후배 이희승과 최현배의 상이한 입장, 문법파와 말본파

    이극로를 민족주의 우파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맞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해방이 되자 이극로는 조봉암이 만든 좌익 계열인 민주주의독립전선에 참여했고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에 가담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미스터리였다.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북협상파 일행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극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경상도가 고향인 그가 북한에 딱히 연고도 없을뿐더러 그의 정치 성향으로 볼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설립에 참여하기 위해서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남북협상 당시에 김규식과 북한을 방문한 이극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맡기는 했지만 철저히 정치와 거리를 두고 오로지 우리말 연구에만 전념했다. 1966년 이극로가 주도한 것이 오늘날 북한의 표준어인 문화어이다.

    해방이 되고 십여 년이 되었지만 남한에서는 우리말 표기법은 통일되지 않았다. 표기법 통일을 주도한 인물이 조선어학회사건의 주범이자 이극로의 오른팔과 왼팔이었던 최현배와 이회승이었다. 문제는 이극로의 두 사제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것이다. 한자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이회승의 주장이었고, 이를 따르는 한글학자들을 문법파라고 불렀다. 반면에 한자를 버리고 순우리말로 한글 표기법을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 최현배의 입장이었다. 이들은 말본파라고 불렀다. 첨예한 논쟁 끝에 문법파가 승리해 오늘날 우리 표준어를 만드는 기준이 됐다. 말본파의 주장이 이극로가 주도한 문화어와 유사하다고 한다. 말본파로 표준어가 통일되었다면 지금쯤 북한의 문화어와 우리말 표준어는 상당히 유사했을 것이다. 말모이는 우리말 사전을 뜻하기도 하지만 (우리말)사전에서 잘 쓰이지 않는 순수한 우리말을 말모이라고도 한다.

    이극로는 이동휘와의 여정을 잡지 <조광>에 ‘수륙 20만리 주유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이 연재는 <고투 40년>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으로 다시 출간됐다. 이극로의 대표적인 호가 물불과 고투인데 고투는 고루를 누군가 잘못 표기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말에 혼신을 다했던 이극로는 월북이라는 이유로 복권되지 않고 있다. 한반도가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훈풍이 불고 있는 이때 그의 삶도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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