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벌의 CVC 소유 허용
    “퇴행적인 친재벌 정책”
    정의당·경실련 등, 정부 주장 맹비판···"순환출자 허용, 금산분리 완화"
        2020년 07월 31일 03: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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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가 ‘금산분리 훼손’ 우려에도 일반지주회사의 기업주도형벤처캐피탈(CVC) 소유를 허용하는 공정거래법개정안을 발표하며 연내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재벌대기업이 사내유보금을 벤처기업에 투자하도록 유인해 벤처 활성화를 하겠다는 것인데, 오히려 이 제도를 악용해 총수일가의 경영권 세습, 사익편취, 경제력 집중만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시민사회계에선 “사실상 순환 출자를 허용하는 퇴행적인 친재벌 정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 겸 경제장관회의에서 ‘일반지주회사의 CVC 제한적 보유’ 방안을 발표했다. CVC란 회사 법인이 대주주인 벤처캐피탈이다. 즉 비금융권 회사가 금융회사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한 금산분리 원칙을 완화해 일반지주회사가 금융회사를 소유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금산분리 훼손으로 인한 여러 부작용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지주회사가 100% 지분을 보유하는 완전자회사만 CVC를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 지분 일부만 가진 자회사나 손자회사 등의 형태론 만들 수 없다는 의미다. 총수 일가가 지분을 보유하는 기업과 계열사에 대한 CVC의 투자를 금지하고, 외부자금도 조성액의 40%까지만 조달이 가능하다. CVC가 투자한 벤처기업의 대기업집단 편입(M&A) 유예기간 확대(10년) 등도 제시했다.

    홍 부총리는 “주요 선진국은 대기업의 CVC 소유를 허용하고 있으며 실제 구글 지주회사 알파벳이 설립한 구글벤처스는 우버 등 다수의 투자 성공사례를 창출하는 등 CVC는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며 “세계적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대기업 자금의 벤처투자 확대, 회수시장 활성화를 통한 벤처투자 선순환 생태계 구축, 우리 경제의 혁신성·역동성 강화를 위해 오랜 논의를 거쳐 일반지주회사의 CVC 제한적 소유 추진방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30일 CVC 허용 발표하는 홍남기 부총리. 박스 안은 이를 비판하는 기자회견과 토론회 모습

    일부 정치권과 시민사회계는 벤처 활성화를 위해 일반지주회사의 CVC 소유 허용하겠다는 정부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발하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이날 성명을 내고 “벤처 활성화를 핑계로 CVC를 통해 수신행위까지 허용한 것은 문재인 정권의 노골적인 금산분리 완화 꼼수로밖에 볼 수 없다”며 “펀드 출자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순환출자를 허용하고, 재벌이 벤처기업마저 사실상 보유해서 중소벤처기업에게 돌아가야 할 정책적 혜택을 가로채도록 방조하겠다는 몰염치하고 시대 퇴행적 방안”이라고 질타했다.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도 31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벤처를 위한다는 것은 거짓 포장이며 정부가 발표한 방안대로 추진된다면 총수일가의 사익 편취와 편법적 경영 승계의 도구가 될 것이 자명하다”며 “문재인 정부는 기대를 거꾸로 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도 건들지 않았던 금산분리의 원칙을 훼손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날 회견엔 박상인 경실련 정책위원장과 전성인 홍익대 교수가 참석해 일반지주회사의 CVC 소유 허용 방안이 총수일가의 편법적 지배력 강화와 승계를 돕는 제도로 악용될 소지가 높다고 우려했다.

    우선 재벌대기업의 사내유보금을 활용해 벤처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정부의 주장은 정책을 조금만 자세히 뜯어봐도 사실과 다르다.

    박상인 정책위원장은 “재벌이 가진 사내유보금 활용하겠다고 했으면 재벌대기업이 가진 자본금만 가지고 투자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계열사도 펀드 출자할 수 있게 하고, 부채를 차입할 수 있게 해주고, 또 펀드에 대해서 마치 사모펀드처럼 투자자를 모집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짚었다. 사내유보금을 활용하겠다고 하면서도 외부 자금을 끌어 모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실련도 성명에서 “정부는 이번 방안의 필요성으로 벤처투자 확대, 생태계의 질적 제고, 벤처와 대기업의 성장 등을 들고 있지만 이 모든 주장은 일반지주회사에 CVC를 허용해주는 것과는 전혀 관련 없다”며 “현재도 재벌들은 일반지주회사를 제외하고 CVC를 이미 운영하고 있고, 지주회사 체제 안에서도 금산분리 원칙을 준수하며 계열사의 편법적 순환출자 없이도 충분히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경실련은 “국내 중소벤처기업에 투자가 부진한 것은 벤처 투자자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투자할만한 제대로 된 벤처기업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는 재벌들의 기술탈취와 단가후려치기, 전속계약 하청구조로 인한 공정한 경쟁의 부재로 혁신 중소벤처기업들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총수 일가가 지분을 보유한 기업과 계열사에 대한 CVC 투자 금지를 통해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등의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는 정부의 대안에 대해서도 실효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전성인 교수는 “총수일가가 지분을 보유한 기업을 막는다고 모든 일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총수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도 총수가 지배하는 CVC가 그 회사(CVC가 투자한 벤처회사)를 컨트롤하고 있고, 맨 끝에 계열사 돈이나 일감 몰아주기로 벤처회사라고 문패를 단 회사의 덩치를 키운 다음 펀드가 투자 자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그 주식을 다른 사람에게 매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총수, 총수 아들, 총수나 총수 아들이 대다수 지분을 보유한 어떤 기업한테 주식 매각이 가능해진다. 이를 통해 총수일가의 지배력 강화나 부당한 승계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벤처 활성화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CVC가 투자한 벤처기업의 대기업집단 편입(M&A) 유예기간을 7년에서 10년까지 확대한다’는 방안은 재벌 대기업의 지원 여부에 따라 벤처·중소기업 존폐가 결정되는 내용이라 오히려 벤처 사멸화를 부추길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박상인 정책위원장은 “중소기업 기본법과 벤처법에 의하면, 벤처와 중소기업은 대규모 기업집단에 소속돼선 안 된다. 그런데 CVC가 투자한 벤처기업의 대기업집단 편입을 10년 동안 유예한다는 것은 대기업의 계열사한테 벤처기업이 누릴 수 있는 특혜를 모두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벤처·중소기업을 위해 만든 정책적 지원을 재벌대기업에서 투자를 받은 벤처들이 독식하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혁신과 벤처가 이 땅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역작용을 낳고, 벤처·중소기업을 사멸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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