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합격자 기념사진에 담긴 역사
    [역사의 한 페이지] 성과 이름 바꾸어야만 했던 시대
        2020년 08월 03일 09: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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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

    우리나라 어디서든 볼 수 있던 전형적인 시골의 모습과 보편적인 가족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 시는 정지용(鄭芝溶)의 시 ‘향수(鄕愁)’의 일부로 아름다운 우리말로 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잔잔하게 노래하고 있다. 정지용은 충북 옥천이 낳은 위대한 시인이다. 시에서 그린 원초적 고향의 모습은 분명 어린 시절 그가 자랐던 옥천에서 경험한 것들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 시로 인해 옥천은 충청도에 자리잡은 그저 그런 고장이 아니라, 식민지 시절 한국인들이 꿈꾼 그리운 고향의 원형이 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이 옥천에 대한 것이다.

    영예 합격자 기념사진

    2019년 12월 어느 날 일제 강점기 사진 한 장을 수집했다. 졸업생과 교사가 찍은 졸업 기념사진인데 일반 졸업 사진과 뭔가 다른 점이 있다. 일단 졸업생 전체 사진이 아니라 일부 졸업생과 교사의 사진이라는 점이다. 남학생 열 명에 여학생이 세 명, 그리고 가운데 양복 차림의 교사가 앉아있다. 마른 체형의 이 교사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는 알기 어렵다. 또한 교장으로 추측되지만 교장 나이로는 다소 젊게 보여 확신할 수는 없다. 남학생들의 복장은 전원 국민복, 여학생들은 검정 치마에 흰색 저고리의 한복 차림이다. 인물들 뒤의 벽에 붙어 있는 종이에는 크게 ‘영예 합격자’라고 쓰여 있고, 그 오른쪽에는 합격한 학교와 학생 이름이 붙어있다. 졸업생 중 명문 학교에 진학하여 학교를 빛낸 인물들만 따로 찍은 기념사진으로 보인다.

    사진 뒷면에는 ‘소화 16년 3월 30일 촬영’이라고 되어있다. 당시는 지금과 학제가 달라 3월 말에 졸업해서 4월에 신학기가 시작되었으니 졸업 시즌에 찍은 것이다. 당시 졸업식은 3월 20일경에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졸업식을 한 후 며칠 뒤 따로 시내 사진관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소화16년은 서기로 환산하면 1941년이다. 그러므로 사진을 찍은 1941년 3월은 중일전쟁이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대략 9개월 전인 셈이다. 요즘도 고등학교의 정문에 명문대학 진학 학생들의 이름을 플래카드로 걸어놓아 학교의 자랑으로 광고하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80년 전의 이 사진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8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명문학교 진학은 최고의 자랑거리임을 알 수 있다. 이것도 우리의 오랜 전통인 것인가?

    [사진] ‘영예 합격자’들 기념사진. 교사와 함께 13명 합격생이 사진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건호 소장)

    이 사진에서 특이한 것은 학생의 교복 오른쪽과 왼쪽 가슴에 각각 진학하는 학교 이름과 학생 이름이 쓰인 종이가 부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학생 이름보다 학교 이름이 4배 정도 크다. 학생들이 합격한 그 학교의 위상이 아주 높고, 아무나 갈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가운데 서 있는 학생의 경우에는 자신의 이름 옆에 합격한 학교 이름이 아니라 ‘我等の志願校(우리들이 지원한 학교)’라고 쓴 종이를 달고 있는데 비해, 그 왼쪽 학생의 가슴에는 자신의 이름 외에 합격한 학교 이름이 두 개가 붙어 있다. 오른쪽 학생이 합격한 학교가 옆으로 밀린 것으로 보이는데, 가슴에 붙인 종이를 통해 최대한 자신들이 왜 여기에 모여 이런 사진을 찍는지에 대한 부연 설명을 친절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이 사진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쉽게 알 수 있도록.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의 가슴에 붙인 자신의 이름·합격학교가 뒷벽에 붙어있는 종이 속 학생이름·합격학교와 일치하는 점이 없다는 것이다. 학생 수는 13명인데, 벽에 붙어있는 학생명단은 9명이다. 벽보 속 9명의 이름과 기념사진 속 13명의 학생 이름이 단 한 명도 중복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벽보 속 9명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 기념 촬영에 참여하지 못했던 학생들의 이름을 따로 적어 붙여 놓았던 것이리라. 학교의 명예를 위해 비록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이름이라도 붙여놓은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학교가 4월 초에 개학하는데, 이처럼 3월 30일에 학생들을 모아 촬영했으니 이런 불상사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촬영 날짜를 조금 더 당기지 못한 학교 측의 불찰이었다. 학교의 일정과 겹쳐서인지 합격한 학생들이 전원 참석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는데, 바로 옥천농업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22명(사진에 찍힌 13명과 불참자 9명)의 영예로운 합격자를 배출한 이 학교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이 합격생들이 합격한 학교 중에 덕성여자중학교, 청주제일중학교, 보성중학교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학교는 오늘날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당시 어느 ‘심상소학교’의 기념사진이었을 것이다. (이 심상소학교의 이름은 1941년 3월 1일 일제 칙령 제148호인 ‘국민학교령’에 의해 4월 신학기부터는 ‘국민학교’로 바뀐다.) 특이한 것은 이 사진 속에 ‘청주사범학교’가 여럿 보인다는 점이다. 이 사범학교가 오늘날은 대학과정에 있지만, 이 사진을 통해 일제 강점기 당시는 초등과정을 졸업하고 사범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학제에 대한 지식 없이도 사진 속의 학생들을 보면 10대 초중반의 앳된 얼굴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두 번째 이 초등학교(당시 ‘심상소학교’)가 있던 지역은 어디였는지 유추해보자. 진학하는 학교의 이름들을 분석해보면 어느 지역인지를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학생들이 진학한 학교들 중 대구사범학교, 경성직업학교, 보성중학교, 덕성여자중학교 등 서울과 대구 지역의 학교들도 있고, 청진수산학교처럼 저 멀리 함경도에 있던 학교도 보인다. 일제 강점기 함경북도 청진은 명태와 정어리로 유명한 도시였다. 하지만 이 학교들을 빼면 나머지는 거의 충청권의 학교들이었다. 그러므로 사진 속의 학교는 일단 충청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다시 범위를 좁혀 충청권의 어느 학교인지 유추해보자. 앞의 학생들에게 가려 일부만 보이거나 빛반사로 인해 그 이름이 명확하지 않은 학교 이름은 일단 배제하고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학교 이름만 보자. 앞 쪽에 앉아있는 대전의원 간호부로 합격한 여학생이 2명이고, 청주제일공립중학교 1명, 청주사범학교가 3명, 청주농업학교 1명…… 그런데 그중 가장 많은 학생이 합격한 곳이 옥천농업학교로 5명의 학생이 이 학교에 합격했다. 그렇다면 이 학교는 옥천에 있는 학교이거나 아니면 청주에 있는 학교였을 것이다.

    [사진] 벽에 붙어있는 합격자 명단에 왼쪽부터 대구사범학교, 대구직업학교, 청진수산학교, 청주사범학교에 이어 옥천농업학교 합격자의 명단이 보인다(붉은 색 테두리 안). 다른 학교는 1명씩인데 비해 옥천농업학교는 무려 5명으로 가장 많은 학생들이 진학한 곳이다. 이 사진 속의 학교가 옥천에 있던 학교임을 추측하게 되는 대목이다. (박건호 소장)

    먼저 옥천부터 살펴봐야겠다. 여기에 없다면 다음에 청주도 살피면 될 것이다. 그런데 학교를 특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이 사진 속에 이미 들어있다. 이 기념사진의 뒷벽의 ‘영예 합격자’라고 쓰인 종이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이런 글이 붙어있다.

    ‘소화16년 26회 졸업’

    26회 졸업이라…….

    그럼 이 단서를 가지고 옥천의 학교들, 그 중 초등학교(그 당시에는 ‘심상소학교’)에 해당하는 학교에 대한 ‘신상털기’를 해보자.

    1941년에 26회 졸업식을 하려면 최소 1915년 이전에 개교한 학교여야 한다. 충북 옥천에 이 정도 역사를 가진 학교로는 두 개 정도를 찾을 수 있다. 옥천죽향초등학교와 옥천청산초등학교이다.

    먼저 옥천죽향초등학교. 이 학교는 1909년 10월 사립 창명학교로 설립되었다. 이듬해 9월 공립으로 개편되어 교명을 옥천공립보통학교로 바꿨으며, 다시 1938년 4월 옥천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옥천죽향국민학교, 그 뒤 다시 죽향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이 학교는 정지용 시인과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의 모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학교는 기념사진 속 그 학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육영수 여사가 이 학교 27회 졸업생인데, 그 졸업연도가 1938년이다. 그렇다면 이 학교의 1941년 졸업생이면 30회 졸업생이 되어야 되므로 26회 졸업과는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옥천청산초등학교는?

    이 학교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에 청산사립신명학교로 개교되었다. 충청북도 전체를 통틀어 세 번째로 오래된 학교로 해방 후인 1946년 청산국민학교, 1996년 청산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학교는 1915년에 첫 졸업생 18명을 배출한 후 2020년 1월 제 105회 졸업생까지 총 9,85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 학교의 연차로 26회 졸업생이 배출되는 해가 1941년이므로 사진 속의 정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잠정적인 결론!

    이 사진은 중일전쟁기였던 1941년 일제 강점기 청산사립신명학교(현 청산초등학교)의 제 26회 졸업생 중 명문학교 합격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찍었던 기념사진이었던 것이다.

    아! 창씨개명

    그런데 이 사진 속에 있는 학생들의 이름이 특이하다.

    세 자가 아니라 네 자씩의 이름을 쓰고 있다는 점. 총 22명의 학생 이름 중 이름이 잘 보이지 않는 학생들을 빼고 그나마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이름은 8명으로 金山國培(금산국배), 新井英雄(신정영웅), 靑松永治(청송영치), 新井慶玉(신정경옥), 宮田文九(궁전문구), 伊東國峯(이동국봉;마지막 글자는 명확하지 않음), 新宮東植(신궁동식) 등으로 창씨개명한 이름들이다. 청주제일공립중학교에 진학하는 ‘黃義燦(황의찬)’ 빼고는 모두 창씨 개명하였다.

    일제는 1940년 2월부터 6개월 동안 창씨개명 신고를 하게했으므로, 1941년 3월 졸업한 이 학생들은 창씨개명 정책 시행 후 첫 졸업생들인 셈이다.

    그럼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먼저 살펴본 후 이 졸업생들의 원래 이름을 찾아보도록 하자.

    일제는 1910년 강제병합 초기부터 상당기간 동안 창씨 개명하고자 하는 조선인들에 대해 금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1등 국민인 내지인과 2등 국민인 조선인을 구별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이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꿔 일본인 행세를 하는 것이 꼴 보기 싫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36년 미나미 지로가 새로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오면서 변화가 생긴다. 그는 머지않아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본 청년들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조선 청년들을 군인으로 동원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급부로 뭔가 줄 것이 필요했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 정책은 이렇게 해서 추진되었다. ‘내선일체의 완전한 실현’을 위한다는 나름의 전략이었다. 한편으로는 조선적인 가족제도, 특히 부계혈통에 기초한 종족집단의 힘을 약화시키고, 일본적인 ‘이에(家)’ 제도를 도입하여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심고자 하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40년 2월 11일에 개정 조선민사령을 실시하였다. 이때부터 창씨개명 정책이 실행되었던 것인데, 씨(氏)의 설정 신고 접수도 시작되어 8월 10일까지 6개월의 신고 기간 사이에 모든 조선인(호주)은 창씨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다면 어떤 씨로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창씨개명 정책이 시작되자 『매일신보』는 ‘오늘은 영광스러운 창씨의 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마침내 11일, 오늘 기원(紀元)의 가절(佳節)은 이천삼백만 반도 동포에게는 황국 2600년의 흥륭을 축하드리는 아름다운 날이면서 동시에 대망해 마지않았던 ‘창씨의 날’”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사진] 창씨 개명 전과 후. 소화 15년(1940년)을 기준으로 ‘趙載奭’이 ‘松山載奭’으로(왼쪽 위), ‘朴東珠’가 ‘二井東珠’로(오른쪽 위), ‘韓奇東’이 ‘上原奇東’으로(왼쪽 아래), ‘姜德植’이 ‘德岡德植’으로(오른쪽 아래) 창씨개명 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모두 박건호 소장)

    총독부는 창씨개명을 독려했다. 그리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여러 불이익을 주었다. 1940년 5월 30일자 윤치호의 일기에는 이런 사정을 보여주는 내용이 나온다.

    시골에서는 민중에게 일본 명(名)을 짓게 하기 위해 지방의 경찰, 관리, 면장이 강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 집을 짓거나 살 때 필요한 허가도 신청서에 일본 명이 적혀 있지 않으면 관리들은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소학교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곳에 따라서는 이름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까지 호적증명을 얻을 수가 없다.

    이런 정책에 대해 한국인들은 다양한 형태로 반응했다.

    안동의 이현구, 고창의 설진영 같은 이들은 자결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저항하였다. 설진영의 자결은 1978년 임권택의 영화 [족보]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 곡성의 류건영도 “슬프다. 이미 나라가 멸망했을 때 죽지 못하고 30년간 치욕을 받아왔지만 이제는 혈족의 성마저 빼앗으려 한다. 나는 짐승이 되어 사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창씨제도를 엉뚱하게 비틀어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성을 바꾸었으니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 되었다하여 ‘이누코 구마소오(犬子熊孫)’로 창씨계를 제출했다가 퇴자를 맞기도 하였고, 또 어떤 이는 ‘개 같은 놈 똥이나 쳐 먹어라’는 의미의 ‘이누 쿠소구라에(犬糞食衛)’로 제출했다가 경찰로부터 문책을 당하기도 하였다. 동래의 어떤 이는 조선인은 성을 바꾸면 개새끼, 소새끼라고 부르므로 개새끼라는 뜻의 ‘이누노 코(犬の子)’라고 창씨계를 제출했다가 거절당한 일을 주변에 말했다가 6개월의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만담가 신불출의 창씨명도 기가 막힌다. 그가 창씨개명한 이름은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이었다고 하는데, ‘玄’과 ‘田’을 합치면 ‘畜(축)’이고 ‘牛’와 ‘一’을 합치면 ‘生(생)’이 되니 말 그대로 축생,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뜻이다.

    저항의 방법에는 일왕 등 일본의 왕족이나 총독을 빗댄 경우도 더러 있었다. ‘덴노헤이카(天皇陛下)’와 일본어 발음이 비슷한 ‘田農丙下’와 같은 이름이 회자되었고,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총독 이름에 빗대 ‘미나미 다로(南太郞)’로 지은 경우도 있었다. 일본인들이 첫째 아들에 ‘太郞’, 둘째 아들에 ‘次郞’을 붙이는 것에 착안해 ‘내가 미나미 지로 네 형님이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한편 관공서에 ‘덴노조쿠 미나고로시로(天皇族皆殺郞)’, ‘쇼와 보타로(昭和亡太郞)’ 같은 이름으로 창씨개명해도 괜찮냐는 엽서를 보낸 이도 있었다. 각각 ‘천황족을 모두 죽일 자’, ‘천황을 죽일 자’란 뜻이다. 일본 왕족 ‘약송궁(若松宮)’의 ‘若松’과 일왕 ‘유인(裕仁)’의 ‘仁’을 결합한 ‘와카마스 히토(若松仁)’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 했다가 불경죄로 경찰에 체포된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마지못해 창씨개명을 하면서 저항은 못했지만, 분노를 삭이는 이들도 있었다. 재미 소설가 김은국(리처드 김)의 자전적 소설 ‘잃어버린 이름’에는 추운 겨울 새로 정한 이름을 등록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함께 줄은 선 어린 소년을 그린 대목이 나온다.

    아직도 건물 밖에 길게 줄은 선 사람들은 구부정하고 웅크린 자세로 귀와 얼굴을 비비고 눈 위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말했다.

    “봐라”

    어리둥절하면서 두렵기도 하고 춥기도 했던 내가 아버지를 올려다보자 얼굴에 눈물이 번진 것이 보였다. “이 모든 것을 잘 봐둬라.” 아버지가 속삭였다.

    “기억해라. 이 날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신고 기간 6개월이 끝났다. 이 신고 기간 동안 식민지 조선의 총 4,123,646호의 호구 중 3,150,634호가 신고하였다. 76.4퍼센트에 해당하는 신고율이었다. 이 기간 동안 제일 바빴던 곳이 셋 있었다. 하나는 창씨 명을 신고 받는 관공서, 또 하나는 새 이름을 지어주는 작명소, 나머지 하나는 종친회였다. 뿌리를 중시하는 조선의 전통에서 친족 전체가 새롭게 창씨를 해야 될 판이니 종친회에서는 연일 피 터지는 논쟁이 있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종친회에서는 본관(本貫)과 성(姓)에서 글자를 따와서 새롭게 일본식 씨(氏)를 만들었다. 김해 김씨는 ‘김해(金海)’로, 안동 권씨는 ‘안동(安東)’으로, 전주 이씨는 조선 왕조의 왕족이라는 자부심을 반영하여 ‘나라의 근본’, ‘궁궐의 근본’이라는 뜻의 ‘국본(國本)’, ‘궁본(宮本)’으로, 밀양 박씨는 시조 박혁거세가 신라의 나정에서 태어났다하여 ‘신정(新井)’으로 하는 등 각 성씨들은 나름대로의 역사와 전통을 살려 이름을 지었다. 운 좋게도 임씨와 류씨와 남씨 등은 일본에 같은 이름의 성씨 林(하야시), 柳(야나기), 南(미나미)이 있어 이전 성씨를 그대로 쓸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영예 합격자 기념사진 속 이름을 남긴 여덟 명의 학생들에 대해 알아보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새로운 창씨 명은 각 성씨별로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정했기 때문에 원래 성씨를 유추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단 성씨만 새로 만들고(創氏) 개명은 안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원래의 이름을 고치지 않고 창씨만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명’의 경우는 일정한 패턴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먼저 ‘신정영웅(新井英雄)’이다. ‘신정(新井)’은 박씨(朴氏)들이 창씨개명할 때 선택한 여러 씨명 중 하나라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므로 영웅이라는 이름이 새로 개명한 이름이 아니라면 그의 원래 이름은 ‘박영웅’이었을 것이다. 세 여학생 중 가운데 앉아있는 ‘신정경옥(新井慶玉)’도 원래 이름은 ‘박경옥’이었을 것이다.

    [사진] 사진 속에 ‘靑松永治’(제일 왼쪽 사진의 남학생), ‘新宮東植’과 ‘金山國培’(가운데 사진 뒤의 두 남학생), ‘黃義燦’과 ‘伊東國峯’(오른쪽 사진)의 이름이 흐릿하게 보인다. (박건호 소장)

    이어서 ‘금산국배(金山國培)’. ‘금산(金山)’은 보통 김씨가 창씨할 때 ‘金海’, ‘金村’ 등과 함께 많이 선택한 창씨 명이었다. 그러므로 ‘금산국배’의 원래 이름은 ‘김국배’였을 것이다.

    다음은 ‘청송영치(靑松永治)’이다. 심씨들은 본관이 경북 청송이다. 그러므로 심씨들은 일부가 ‘송본(松本)’을 선택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아예 본관의 이름을 그대로 창씨명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청송영치’의 원래 이름은 ‘심영치’였을 것이다.

    그럼 부전문구(富田文九)의 ‘부전(富田)’은 무엇이고, ‘이동국봉(伊東國峯)’의 ‘이동(伊東)’은 무엇일까? ‘부전(富田)’은 나씨(羅氏)들의 창씨명 중의 하나이고, ‘伊東’은 윤씨(尹氏)들의 창씨명 중의 하나이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지식인 윤치호(尹致昊)의 창씨명도 ‘이동치호(伊東致昊)’였다. 그러므로 개명을 하지 않고 성씨만 바꿨다는 전제로 ‘富田文九’는 ‘羅文九’, ‘伊東國峯’은 ‘尹國奉’이 원래 이름이었을 것이다.

    다음 ‘新宮東植(신궁동식)’인데, 창씨한 ‘신궁(新宮)’은 원래 성씨가 무엇이었는지 확인이 쉽지 않다. 창씨한 성씨 일람표에 잘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정밀하게 찾아보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다음 기회로 미룬다.

    마지막으로 청주제일공립중학교에 진학하는 ‘황의찬(黃義燦)’만 남았다. 그런데 황의찬은 유일하게 새로운 창씨 명을 쓰지 않은 학생이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서 있다. 그 당시 황씨들도 ‘黃原’, ‘芳村’, ‘檜山’, ‘黃田’, ‘黃本’, ‘廣田’ 등으로 창씨했는데, 황의찬의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또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의찬이 학교에서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는지도 궁금하다.

    이렇게 나름 열심히 학생들의 원래 이름을 규명한 나는 졸업생들의 원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확신할 수는 없었다. 또한 이름이 흐릿하게 보이거나 가려진 이름들도 모두 다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자료들을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찾게 되었다.

    지난 2005년에 옥천의 청산초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특별한 기념행사를 열었다는 기사였다. 그 행사는 1941년 26회부터 1945년 31회까지의 졸업생들에게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된 졸업장을 받은 졸업생들에게 새롭게 원래의 한글이름으로 만든 졸업장을 수여하는 것이었다. 흥미진진한 행사였다. 학교 총동창회에 연락을 해서 졸업생 명단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러면 창씨개명 전후의 이름에 대해 내가 추측한 내용이 맞는지 아닌지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0년 1월 초 동창회장과의 연락은 실패로 끝났다. 이어서 당시 저 행사를 취재 보도한 옥천신문의 황민호 기자에게 연락을 취해 보기로 했다. 저 행사를 취재했다면 뭔가가 남아있을 것이다. 2020년 4월 어느 날 검색 기사에 나오는 기자의 e-메일 주소로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받은 황 기자는 이 사진에 큰 관심을 보이며, 바로 전화 연락을 주었다. 그 이튿날 그는 청산초등학교를 직접 방문해 주었다. 그리고 학교 관계자를 통해 이 사진이 청산초등학교 26회 졸업생들 사진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고, 26회 학생들의 학적부도 찾아냈다. 하지만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열람을 할 수 없었다고 아쉬움을 전해왔다.

    어쩌랴. 법이 그런 것을.

    이후 황 기자는 동문회 관련자들을 수소문하였지만, 한글 졸업장 만들 당시의 자료는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당시 개교 100주년 행사에서 한글 이름으로 된 졸업장을 받은 전용익 할아버지(청산초등학교 28회 졸업생)를 직접 찾아가 사진을 보여주면서 누군지를 물어보았지만 이미 90세를 훌쩍 넘은 할아버지는 사진 속의 인물들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사진을 수집하면서부터 시작된 8개월간의 기나긴 여정은 여기서 끝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옥천신문의 황민호 기자에게 고마움을 이 자리를 빌어 전한다.

    *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황민호 기자는 내가 보낸 메일을 바탕으로 이미 이 사진에 대해 옥천신문에 2020년 4월 28일 옥천닷컴에 ‘80년 전 옛날 사진을 꺼내다. 서울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참고하시기 바란다.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3587

    [사진] 2005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천 청산초등학교는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된 이름으로 졸업장을 받은 졸업생들에게 한글이름의 졸업장을 수여하는 행사를 거행했다. 왼쪽은 행사 당시 28회 졸업생이었던 전용익씨가 졸업장을 받는 장면이다. 오른쪽은 청산초등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의 학적부로 저 안에 사진 속 주인공들의 이름들이 수록되어 있을 것이다. (두 사진 모두 황민호 기자 제공)

    그리고 덧붙여

    이전에 수집한 자료 중에 창씨개명과 관련된 흥미로운 자료가 하나 있다. 2016년 5월 수집하였는데 1941년 해주신정공립고등여학교(海州新町公立高等女學校)의 제6회 졸업 기념앨범이다. 고등여학교는 오늘날의 여자중학교에 해당한다. 이 앨범 속에는 총 52명의 졸업생 사진과 이름이 실려 있다. 옥천 청산초등학교 26회 졸업 앨범과 마찬가지로 창씨개명 정책이 시행된 후의 첫 졸업식 앨범이라 일본식으로 바뀐 이름이 인쇄되어 있다. 그런데 이 앨범의 원래 주인이 친구들 이름 옆에 개명하기 전의 이름을 연필로 일일이 써 놓았다. 이 꼼꼼한 기록들 때문에 창씨개명 전후의 이름을 정확히 비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청산초등학교에서 풀지 못한 한을 여기서나마 풀어보기로 했다.

    먼저 창씨개명 전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이름을 어떻게 불렀는지부터 살펴보자. 창씨개명 전부터 학교에서 공식적으로는 이름을 부를 때는 한글발음으로 부르기보다는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립학교의 경우는 다를 수 있었겠지만. 이와 관련하여 일제 강점기 초등학교(당시 ‘보통학교’ ‘심상소학교’, 혹은 ‘국민학교’) 교사생활을 했던 이의 다음 증언이 눈에 띤다.

    본격적인 창씨개명 시키기 전에는 이런 식으로 불렀어요. 예를 들면 김은희라는 이름에서 ‘은혜 은’(恩)은 일본 말로 ‘옹’이라고 해서 김옹끼, 은숙이라고 똑같이 ‘은’자가 들어가지만 ‘은 은’(銀)자라서 김깅끼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김옹끼, 얘는 김깅끼가 되요. 사정이 이러하니 아이들은 자기 이름을 불러도 못 알아들었어요. 이름이 비슷하니까 혼동스러워 했던 거죠. 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데도 그걸 모르는 심정! 그런 슬픔이 있었던 겁니다.

    – 배은식 증언, 『8.15의 기억』, 한길사, 2005년

    이런 상황에서 1940년부터 창씨개명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전에는 학생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발음했던 정도에 그쳤다면, 이제는 아예 학생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던 것이다.

    [사진] 왼쪽은 1941년 해주신정공립고등여학교의 제6회 졸업식 앨범이다.(박건호 소장)

    이 앨범 속 학생들 사진 아래에는 창씨개명된 이름이 인쇄되어 있는데, 이 앨범의 원래 주인이 사진의 오른쪽에 연필로 창씨개명 이전의 이름을 써 놓았다. 창씨개명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기에 좋은 자료이다.

    당시 황해도 해주에 있던 해주신정공립고등여학교의 학생 52명은 어떻게 이름을 바꾸었을까? 여학생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백석순(白錫舜) ⟶ 白原幸枝 / 배영숙(裵營淑) ⟶ 武本豊子
    이춘화(李春華) ⟶ 木下洋子 / 홍정옥(洪貞玉) ⟶ 德山智子
    이선화(李善花) ⟶ 森山芙美子 / 김규옥(金奎玉) ⟶ 金田奎玉
    이채옥(李彩玉) ⟶ 靑山彩鈺 / 김정숙(金貞淑) ⟶ 香野千惠子
    정취열(鄭翠悅) ⟶ 北島悅子 / 오숙자(吳淑子) ⟶ 高山淑子
    김유현(金裕賢) ⟶ 金岡靜子 / 민병희(閔丙姬) ⟶ 峰村昭子
    류광수(柳光秀) ⟶ 柳勝子 / 함화순(咸花順) ⟶ 松田美保子
    오혜숙(吳惠淑) ⟶ 松岡はつよ / 김용숙(金龍淑) ⟶ 永原富美子
    강신애(姜信愛) ⟶ 神田雅代 / 이영숙(李英淑) ⟶ 牧山慶子
    김보영(金寶榮) ⟶ 金子雅枝 / 이준옥(李俊玉) ⟶ 三井俊玉
    정운순(鄭雲順) ⟶ 河東喜代子 / 고현숙(高賢淑) ⟶ 宋尾澄子
    민신원(閔信源) ⟶ 秋原信子 / 강석애(姜錫愛) ⟶ 和永美代子
    증혜향(曾惠鄕) ⟶ 平山ヒサ子 / 민경숙(閔庚淑) ⟶ 閔元淑子
    이지응(李芝膺) ⟶ 牧山芝膺 / 윤필석(尹弼錫) ⟶ 平沼增子
    김득중(金得重) ⟶ 金村美惠子 / 송인숙(宋仁淑) ⟶ 三井仁淑
    조선부(調善富) ⟶ 高山美佐子 / 이명희(李明姬) ⟶ 松原澪子
    강옥란(姜玉蘭) ⟶ 松田明惠 / 민병도(閔丙桃) ⟶ 平野和子
    공무길(孔珷吉) ⟶ 孔部志美 / 김재숙(金載淑) ⟶ 星野淑子
    김정숙(金貞淑) ⟶ 金岡貞子 / 이영수(李永壽) ⟶ 國本明克
    강숙영(姜淑永) ⟶ 神川淑子 / 김인홍(金寅弘) ⟶ 金澤富美子
    김선비(金仙妣) ⟶ 金村佳枝 / 안복순(安福順) ⟶ 安田順子
    홍영자(洪英子) ⟶ 大原映子 / 공태숙(孔泰淑) ⟶ 丘山恩子
    고영주(高英珠) ⟶ 高田吉子 / 김금련(金錦連) ⟶ 金元美沙子
    김영은(金迎銀) ⟶ 江山絹子 / 최필완(崔弼妧) ⟶ 松山靜子
    염송희(廉松姬) ⟶ 佐藤松枝 / 최옥숙(崔玉淑) ⟶ 岩田榮美子
    정영숙(鄭永淑) ⟶ 福永靜子 / 윤선(尹善) ⟶ 平沼貞子

    이를 바탕으로 이름의 변화 유형을 정리해보자.

    해주신정공립고등여학교의 1941년 제 6회 졸업생들의 사례이다.

    먼저 5명은 새로 창씨만 하고 이름은 이전의 것을 그대로 썼다. 이채옥(李彩玉 ⟶ 靑山彩鈺), 이준옥(李俊玉⟶ 三井俊玉), 송인숙(宋仁淑⟶ 三井仁淑), 이지응(李芝膺 ⟶ 牧山芝膺), 오숙자(吳淑子 ⟶ 高山淑子)가 그들이다. 그리고 창씨만하고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은 위와 다를 바 없는데, 이름의 한자를 바꾼 경우가 1명 있었다. 이 학생은 ‘홍영자(洪英子)’로 원래 가운데 한자가 ‘英’이었는데, ‘大原映子’로 바꾸면서 ‘暎’이라는 한자를 쓰고 있다.

    한편 성은 그대로 쓰고 이름만 바꾼 경우도 1명 있다. 그 학생은 ‘류광수(柳光秀)’로 ‘柳勝子’로 이름을 바꾸었다. 林氏, 南氏가 그런 것처럼 柳氏는 일본에 같은 성씨가 있어 창씨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성씨는 그대로 두면서도 눈치가 보였던지 이름만은 ‘승자(勝子)’로 개명했다.

    위에서 소개한 7명의 사례를 빼고는 나머지 모두는 새로 창씨하면서 이름도 같이 바꾸었다. 모두 45명이다. 이 부분은 사실 좀 당황스러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내가 수집한 많은 상장이나 편지 등에서는 창씨는 새로 하면서도 이름은 이전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해주의 이 고등여학교 앨범의 경우는 그런 것들에 비해 개명까지 같이 한 사례가 현저히 많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이 해주 지역의 특수성인지, 아니면 남자와 구별되는 여성들의 특수성인지, 아니면 이 여학생들이 다닌 고등여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하게 압박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이건 다음의 과제로 남겨둔다.

    이 앨범에서 특이한 점이 하나 더 있다. 여학생의 창씨 개명한 이름에 유난히 ‘-子(꼬)’가 많이 들어갔다는 점이다. 창씨개명 이전에 이름에 ‘子’자가 들어있던 학생은 오숙자(吳淑子) 밖에 없었다. 그런데 창씨개명으로 전체 52명 중 38명으로 그 수가 급증했다. 비율로는 무려 73%인 셈이다. 이제 한때 한국 여성들의 이름의 대명사가 된 미자, 춘자, 복자, 숙자, 영자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의 다음 구절은 그래서 빈 말로 보이지 않는다.

    박용화는 전혀 수업을 할 기분이 아닌 채로 출석부를 펼쳤다.

    그는 아동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야마모토 후미꼬.]

    [하이.]

    [마쓰오 하루꼬.]

    [하이.]

    [기우찌 에이꼬.]

    [하이.]

    [요시다 하루꼬.]

    [하이.]

    [요시하라 후미꼬.]

    [하이]

    [하라노 후미꼬.]

    [하이]

    박용화는 그만 짜증이 나고 말았다. 성만 다를 뿐 같은 이름이 너무 겹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7명의 이름을 부르는데 에이꼬(英子)와 하루꼬(春子)가 둘씩이었고, 후미꼬(美子)는 셋이나 되었다. 그건 단시일 내에 창시개명을 몰아붙인 결과였다. 시골사람들이 어떻게 고쳐야 좋을지를 모르고, 동네 단위로 몰아대다 보니 일은 바쁘고 해서 면서기들이 제멋대로 일본식 작명을 해댄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끝에는 무조건 <꼬>를 붙여서 영자·춘자·미자·숙자 등이 무더기로 나오게 되었다.

    -조정래, 『아리랑』 11권 중에서 –

    * 이 글은 [레디앙]와 [옥천신문]에 동시에 기고한 글입니다.

    * <역사의 한 페이지>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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