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전기 연재를 마치며
    장제스와 국민정부는 왜 패배하였나
    [국공내전-70](연재 마지막회) 덧붙이는 이야기②
        2021년 04월 14일 10: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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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민(이철의) 선생의 국공내전 연재가 70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성실하고 꼼꼼하고 해박한 지식으로 중국 현대사의 가장 치열했던 시기를 설명하고 분석해준 필자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애정과 관심을 보내주신 독자들에게도 인사를 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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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내전> 연재칼럼 링크

    등장인물 몇 사람의 뒷이야기

    2년 넘게 해 온 연재가 드디어 끝이 난다. 2018년 11월 24일 시작했으니 햇수로 거의 2년반 가까이 끌어왔다. 도중에 건강문제로 1년 가까이 쉬었고 작년에도 두 달 가까이 쉬었다. 애초에 능력에 넘치는 일을 시작하였다. 중국 현대사에 문외한이고 중국어로 사회과학 서적 정도를 겨우 읽는 주제에 무슨 배짱으로 일을 벌였는지 모르겠다.

    중국의 국공 내전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것은 2017년 봄이었다. 처음에는 번역을 하려고 베이징 신화서점에서 원서를 사왔다. 중국에서 내전을 주로 다루는 작가가 쓴 ‘해방’이라는 실록이었다. 두 권 합쳐 거의 2천 페이지 가까운 두께였지만 돈키호테처럼 달려들어 번역을 시작하였다. 한 달 정도 열심히 작업을 하다가 어느 날 집어치웠다. 나는 아니다 싶으면 포기하는 것도 빠르고 미련도 두지 않는다. 무엇보다 책이 재미가 없었다. 어릴 때 보던 반공드라마 ‘전우’나 미국의 2차대전 드라마 ‘전투’를 보는 것 같았다. 해방군은 늘 영용하고 국군은 무능하고 바보 같았다. 마오쩌둥은 늘 침착하고 여유가 있으며 심지어 유머까지 있는데 장제스는 늘 허둥지둥하고 화만 내었다.

    내가 중국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고 쓰는 사람도 아닌데 그런 ‘소설’을 번역할 이유가 있나? 중국 CCTV의 드라마 ‘해방’도 두 번이나 보았다. 그밖에도 ‘펑더화이 원수’ ‘서남 대해방’ ‘쑤위’ 등의 드라마도 보았다. 드라마는 책보다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해방’ 드라마는 마오쩌둥 역을 맡은 배우와 저우언라이 역을 맡은 배우가 정말 닮았다. 주더를 맡은 배우도 무척 닮았는데 하나같이 연기도 자연스러웠다. 장제스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도 훌륭하였다. 실제 장제스보다 덩치가 크고 잘 생겨서 정말 마오쩌둥의 적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재를 마친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하다. 내가 쓴 내전기가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딱딱하고 자료 인용에 치우쳐 있으며 지나치게 길다. 한 회 연재분이 A4 7페이지에서 12페이지에 이르니 누가 그걸 읽고 있겠나? 그래도 나는 고집스럽게 자료를 충실하게 인용하였다. 연재 원고를 초고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초고를 대폭 손질한 뒤 책으로 낼 생각이다. 자료나 전투 장면은 줄이고 에피소드를 더하여 읽는 재미도 추구하려 한다. 그렇다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생각은 없다. 나는 실록을 쓰는 마음가짐으로 이 원고를 썼다. 그동안 지루함을 참고 읽어주신 소수의 독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장제스와 국민정부는 왜 패배하였나?

    장제스는 마오쩌둥에게 패배하였지만 우습게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신해혁명 실패 뒤 군벌 할거의 천하대란을 평정한 일세의 효웅이었다. 그는 과단성 있고 결기가 강한 인물로 우한의 국민당 정부와 갈라서 난징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정치력도 뛰어나 자신과 다투던 리쫑런, 옌시산, 펑위샹 등 군벌들과 손을 잡았으며 장쉐량도 휘하에 두어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가 불운한 것은 정권을 잡자마자 일본과 중일전쟁을 치러야 했다는 점과 불세출의 천재 전략가 마오쩌둥을 적으로 둔 것이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여러모로 대조가 되는데 성실성으로 말하자면 장제스가 훨씬 윗길이다. 장제스는 평생 일기를 썼으며 기도를 빼놓지 않았다. 쑹메이링과 결혼한 뒤에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한눈판 일도 없었다. 그에 비해 마오쩌둥은 밤새 일하고 낮잠을 즐겼으며 엄청난 골초여서 늘 담배를 물고 살았다. 그는 두 번이나 중혼을 하여 양카이후이, 허쯔전 등 부인이 있는데도 새 부인을 맞아 들였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여자관계를 비교하면 항우와 유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항우는 명문가 출신에다 자부심이 강하고 고고하였다. 순정이 있어 오로지 우희만 사랑하고 한눈팔지도 않았다. 해하에서 그의 죽음은 얼마나 장렬하고 미학적인가?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권유를 뿌리치며 말하기를 “강동의 8천 자제를 모두 잃고 무슨 면목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그에 비하면 유방은 천하의 잡놈으로 여자를 밝히기를 밥보다 더하고 몰상식하기로는 고명한 선비의 모자에 일부러 오줌을 갈길 정도였다. 그래도 역사의 승자는 유방이니 멋있다고 하여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꼭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마오쩌둥은 리더로서의 자질이나 품격이 장제스보다는 한참 위였다. 여자 문제만 좀 그렇다는 뜻이다.

    만년의 장제스와 쑹메이링

    장제스는 자신이 실패한 원인을 곱씹어 반성하였다고 한다. 타이완에서 국민당 정권은 불완전하나마 토지개혁으로 농지를 분배하였고 부패도 일소하려고 애를 썼다. 그 결과 타이완은 지금 중국보다는 빈부격차가 덜한 사회가 되었다.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가 계엄령을 해제하고 야당을 합법화시키는 등 정치적 민주화도 진전되었다. 현재 타이완은 야당이던 민진당이 계속 집권하고 있다.

    그러면 장제스와 국민정부는 왜 공산당에게 패배하였을까?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많은 이들이 분석을 시도하였다. 아예 “장제스는 왜 패배하였는가?” 하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출간될 정도이다. 나는 중국 출신의 미국인 이마뉴엘.C.Y.쉬의 글을 인용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쉬는 국민정부가 패배한 원인 중 첫 번째로 항일전쟁을 손꼽는다.

    “짧게는 8년간, 길게는 만주사변부터 비롯한 중일전쟁은 국민당 정부의 원기를 철저하게 소진시켰다. 항일전쟁이 없었다면 중국의 정세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이마뉴엘 C.Y. 쉬 ‘근현대 중국사’ 도서출판 까치 788-789쪽 인용) 쉬는 항일전쟁을 거치며 국민정부 군대가 장비와 훈련, 그리고 병력수에서 우세했지만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렸다고 하였다. 항전 승리로 겨우 사기와 원기를 회복하였는데 다시 내전이 시작된다는 것은 병사는 물론 지휘관들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에 비해 공산당은 항일전쟁 기간에 대대적으로 군사력을 확충하였으며 왕성한 사기와 원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날에 대한 공산당의 자신감과 투지가 전쟁의 승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장제스의 독단적이고 무능한 전략과 군대 지휘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은 국민정부 군대의 만주 파병을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 결과로 50여만명의 정예병력을 소모하고 최신 무기를 공산당에게 넘겨 주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옌안을 비롯한 서북지역에 대규모 파병을 한 것도 실책으로 꼽았다. 그 결과는 주력 정예군 40만명의 섬멸이었다. 그 외에도 그는 중요한 결전에서 두위밍이나 바이충시, 황바이타오, 왕야오우 등의 전략이나 전술 건의를 듣지 않고 직접 지휘를 일삼았다. 동북에 공산당과 친밀한 웨이리황을 파견한 것도 중요한 실책의 하나였다.

    경제적 파탄은 장제스 정권 붕괴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항일전쟁 시기부터 이미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던 인플레이션은 내전 기간 완전히 통제 불능한 지경이 되었다. “유통화폐 총량은 1937년 1월 13억위안에서 1948년 연말 245,589,990억위안에 이르게 되었다. 물가인상을 보면 더욱 실감이 나는데 1945년부터 1948년 사이 매월 – 매년이 아니다 – 30퍼센트가 뛰었다. 전쟁 말기에 이르면 상황이 더욱 심각해져 1948년 8월에서 1949년 4월 사이에 지폐가 4,524배 중가하였다. 상하이 물가지수는 13만5,724배가 상승하였다.(‘근현대 중국사’ 788쪽) 경제에 완전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어지러울 지경이다. 이렇게 되고도 정권이 망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렇게 민생을 파탄시켜 놓고도 정권이나 관리들의 태도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본 점령지에서 온갖 고통을 맛본 민중들은 돌아온 군대와 관리들에게 혹독한 수탈을 당하였다. 그들은 민중들을 매국노나 반역자 취급을 하며 양곡 수탈, 적산 착복, 일본 괴뢰정권 시절의 화폐개혁 등을 통한 수탈로 배를 채웠다. 고위지휘관들은 축첩이나 축재로 사복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고 병사들은 민가를 약탈하니 하루가 다르게 민심이 멀어졌다. 강한 규율로 무장하여 민중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한 공산당과 해방군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민심의 바다를 나아갈 수 있었다.

    냉온탕을 오가며 원조와 압박을 반복했던 미국의 책임도 크다. 한국의 어떤 필자는 미국의 정책이나 태도를 가장 중요한 실패 원인으로 꼽기도 하였다. 하지만 병력과 장비면에서 압도적이었던 국공 간의 군사력 차이를 보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마뉴엘 쉬의 기술은 수긍이 간다. 중일전쟁 시기에 미국이 중국을 좀 더 지원했으면 인플레이션이나 경제 파탄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2차대전 말기 중국대륙에 있는 일본군을 직접 공격하지 않은 것도 원인으로 꼽는다. 그랬다면 미국이 수복한 영토를 직접 국민정부에 넘겨 준다는 시나리오가 성립한다. 하지만 이런 지적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내전 초기 국민정부는 중원지역과 동북지역을 거의 완전히 석권하였다. 중원지역의 해방군은 서북과 서남, 산둥지역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동북지역은 쑹화장 너머로 밀려 버렸다. 소련이 무기와 장비, 그리고 점령지를 넘겨준 동북에서 해방군은 속절없이 패배하여 밀려났던 것이다. 그 후의 일은 완전히 장제스의 지휘능력 미비와 국군의 사기 저하에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미국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장제스는 미국의 휴전 방침을 뿌리치지 못하고 동북에서 추격을 멈췄다. 중원지역에서도 휴전을 통해 시간을 벌려는 공산당의 전략에 말려들어 공격할 시점을 늦춰 해방군이 탈출할 시간을 주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온갖 방해에 대하여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하였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계획과 방침에 철저하였다. 창장을 건너지 말라는 스탈린의 방침에 마오는 측근에게만 울화를 내보이며 창장 도하를 명령했던 것이다. 그것도 회담 결렬의 책임을 국민정부에게 교묘히 전가하며 명분까지 얻었으니 전략이나 전술, 정치력에서 장제스는 마오쩌둥의 적수가 아니었다.

    이마뉴엘 쉬는 미국이 더욱 강력하게 휴전과 민주정부 성립을 밀어붙였으면 내전이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설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미국의 중재에 따라 연합정부 수립에 동의하였을까? 나중에 저세상에 가서 두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물어보고 싶다. 아마 두 사람 모두 “아마 몇 년은 그냥 넘어갈 수 있었겠지. 그래도 결국 내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쓸데없고 바보 같은 질문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위의 글은 이마뉴엘 쉬의 책에서 대부분 인용하였다. 필자가 보기에는 공산당의 능력과 조직력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을 하면 어느 정부도 여러 가지 어려운 점에 시달린다.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것이 어떻게 국민정부 쪽에만 있을 수 있겠는가? 상대적으로 훨씬 좁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해방구에서 공산당과 해방군은 “없으면 함께 덜 먹는, 그리고 일반 민중들이 먹는 것과 같은 것을 먹는” 태도로 민심을 얻었다. 밀리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진행한 토지개혁 등 농민 정책은 민심은 물론 갈수록 해방군이 확대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고립시키기 위해 펼친 민주연합 전술, 이른바 신민주주의 정책도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면 민주동맹 등 우호적인 세력은 물론 국민정부의 고위 당정인사, 그리고 고위 지휘관들의 기의, 실제로는 귀순이 잇따르는데 신민주주의 정책과 적극적인 정치적 포섭방침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공산당의 조직력은 마오쩌둥의 군사전략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마오쩌둥은 휘하 지휘관들의 전략이나 전술 방침을 흡수하여 전체 군에 확대하여 효과를 더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병단 사령원이던 천겅의 “단위 전투에서는 최소 네 배의 병력 우세를 만들어야 한다.”는 전술 사상이다. 마오쩌둥은 내전 초기 해방군이 완전히 수세일 때 “땅에 연연하지 말고 적을 소모시키라.”는 방침으로 전력을 유지하였다. 즉 현지 지휘관들이 전황이 불리하면 즉시 후퇴할 수 있는 전술적 유연성을 부여해준 것이다. 그래서 해방군은 잇따른 패배나 후퇴 속에서도 주력을 그대로 보전한 채 반격의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끝까지 사수하라‘는 방침으로 대규모 병력을 소모시키던 장제스와 대비되는 부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첩보원의 운용과 적시 활용은 마오쩌둥이 ’손자병법‘을 괜히 탐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국민정부 국방부 작전청장이던 궈루구이를 비롯하여 중요한 전투에는 반드시 공산당의 첩보원이 맹활약하였다. 국군이 옌안의 공격할 때에도 송샹후이가 미리 정보를 주어 철수할 시간을 벌었고 승패를 사실상 가름한 화이하이 전역의 서전에서도 기의 부대가 공산당에게 진격로를 열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쓰촨의 전역에서도 류종콴이 온갖 군사정보를 해방군에게 넘겨주어 장제스의 마지막 비원을 파탄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수많은 첩보원들은 대부분 저우언라이와 연결되어 지휘를 받았다. 저우언라이의 능력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삼국지연의나 초한지 식으로 말하자면 ”마오쩌둥에게는 저우언라이가 있고 장제스에게는 말 잘 듣는 심복밖에 없어 패배하였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젊은 시절의 저우언라이 덩잉차오 부부

    장제스에게 높이 살 점이 있다면 불굴의 투지와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장제스는 잇따른 패배에도 결코 기가 꺾이지 않았다. 마지막 저항 거점으로 생각한 쓰촨에서도 끝까지 공산당에게 저항할 전략과 방침의 수립에 골몰하였다. 타이완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반공대륙‘의 비원을 품은 채 푸젠성을 공격하는가 하면 미얀마에서 윈난성을 공격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런 장제스의 투지가 있어 자신은 물론 아들인 장징궈에 이르기까지 타이완에서 정권을 유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오로지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여 중국대륙을 통일하였다. 믿었던 스탈린과 소련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중요한 시기에 헛발질을 일삼았다. 오랜 고난 끝에 신중국을 설립한 마오쩌둥과 공산당, 그리고 공산당을 절멸 직전까지 밀어붙였던 장제스와 국민정부, 이들의 뒷날은 어찌 되었을까? 내전 이후의 상황은 국내에 수많은 번역본들이 있으므로 자세한 기술은 피하려 한다. 다만 필자가 흥미를 느꼈던 몇 가지 에피소드만 써서 이 길고 딱딱한 내전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중국으로 돌아간 리쫑런

    장제스가 하야한 뒤 총통 대리를 맡았던 리쫑런은 바이충시 부대가 섬멸당하자 정치적 기반이 사라졌다. 1949년 11월 그는 홍콩으로 갔는데 사실상 망명이었다. 리쫑런은 곧바로 미국으로 가서 10년 동안 살았다. 1950년 타이완에서 총통에 복귀한 장제스는 1954년 리총런을 부총통 직무에서 파면하였다. 리쫑런은 국민대회에서 선출된 선출직인데 총통이 파면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장제스가 자신을 파면하자 리쫑런은 다음 해인 1955년 ‘타이완 문제에 대한 건의’라는 입장을 공개 발표하였다. 리쫑런의 입장은 “타이완의 독립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장제스와 더욱 틀어진 리쫑런은 10년 후인 1965년 마침내 중국에 입국하였다. 리쫑런이 입국할 때 총리이던 저우언라이를 비롯하여 펑전, 천이, 예젠잉, 뤄루이칭 등 정치와 군사 쪽의 최고 인사들이 영접을 나왔다. 국민당의 고위 인사들이던 황샤오훙, 푸쭤이, 루한, 샤오리즈, 류페이 등도 출동했으며 출옥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두위밍, 쑹시롄, 랴오야오샹 등 과거 국민정부의 고위 군사 지휘관들도 참석했다. 특히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던 푸이까지 나와 리쫑런의 정치적 위상을 실감하게 하였다.

    리쫑런은 귀국 인사에서 “나는 해외에서 16년간 속죄하였다. 공산당의 영도 아래 전국 인민들이 국가의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다. 나도 돌아왔으니 전국 인민들의 뒤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하고 싶다.”고 밝혔다. 리쫑런의 비서이던 청스위안은 마오쩌둥에게 리쫑런을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주석으로 기용할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리쫑런은 중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1969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후 청스위안이 전인대 부주석으로 기용된 것을 보면 리쫑런 문제에는 어떤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쑨원의 ’경자유전‘을 실행한 천청

    장제스가 가장 신임하던 천청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내전 초기 육군 참모총장으로 장제스를 보필하였다. 그러나 동북에서 린비아오에게 참패한 뒤 총장 직위에서 해제되어 타이완성 주석으로 전보되었다. 그는 타이완에서 장제스의 대륙 철수 기반을 닦았다. 천청은 타이완 경비사령 및 국민당 부주석, 행정원장을 역임하며 정치적으로 완전히 재기하였다.

    천청은 본래 국민당 내에서 손꼽히는 개혁파였다. 그는 축재를 일삼는 국민당 고위층 가운데 청렴한 편이었으며 축첩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토지개혁을 주장했는데 타이완성 주석이 된 후 두 달 뒤 전격적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우선 소작료를 37.5%로 제한하는 조치를 실행하였다. 그후 일 년 뒤 행정원장이 되어 일관되게 토지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타이완의 농민들은 ’경자유전‘의 혜택을 입게 되어 쑨원의 유지가 비로소 실현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토지개혁은 타이완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자본축적에 도움을 주어 이후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타이완이 사회주의 대륙보다 더 빈부격차가 적은 데에는 천청의 노력이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천청은 타이완 부총통에 당선되는 등 순조로운 정치생활을 이어 갔으나 장제스와 충돌도 적지 않았다. 천청은 장제스가 초지일관 주장한 ’반공대륙‘ 정책을 반대하였다. “세력이 호각이어야 반격을 할 수 있지 정신이나 구호만으로 되는가?” 하는 것이 천청의 생각이었다. 또한 장제스가 당헌을 바꿔 종신 총통을 하려는데도 불만이 있었다. 그래도 토지개혁 등으로 민심을 사서 그는 계속 승승장구하였다. 1965년 천청은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타이완의 농민들이 모여 애도했다고 한다. 천청의 일생을 보면 군인으로는 능력 부족이었지만 정치가나 행정가로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천청은 사람의 신념이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해 보였다. 국민당 안의 방해세력과 타이완 지주들의 완강한 반대 의사 속에서 토지개혁을 추진한 것을 보면 그가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제스의 장례식 모습

    장제스는 1975년 4월 5일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총통 자리는 아들인 장징궈가 물려 받았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는 장제스의 사망을 가리켜 “신화사 보도에 따르면 국민당 반동파의 두목이자 중국 인민의 공적인 장제스가 4월 5일 타이베이에서 병사했다.”고 썼다. 그러나 중국에서 그의 평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장제스의 일생을 가리켜 미국의 중국계 사학자인 황런위는(黄仁宇) “장제스는 대독재자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독재자로서의 도구가 없었다. 그는 민주투사가 될 수 없었지만 그럴 기회도 없었다.” 장제스는 시대의 환경과 한계 아래 살았으니 옳은 평가라고 할 것이다.

    장제스의 사망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별말이 없었다고 한다. 보고를 받은 마오는 다만 “알았다.”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오랜 적수가 죽었는데 어찌 감상이 없었겠는가? 마오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이미 장제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도 상당히 희석되어 있었다. 마오는 곧잘 장제스를 “오래 사귄 친구”라고 했다. 장제스가 자신을 “도적”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껄껄 웃더니 “우리도 그를 도적이라고 불렀지 않나?”했다 한다. 승자의 여유라고 할 수도 있다.

    바이충시, 타이완에서 우울한 세월을 보내다

    장제스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해 총통에서 은퇴하게 하였던 바이충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바이충시는 휘하 부대가 섬멸당한 뒤 타이완으로 탈출했다. 1950년 1월 바이충시는 리핀선과 연명으로 리쫑런에게 전문을 발송했다. “미국에서 계속 정양하면 국사를 볼 수 없으니 총통 직무대리를 사직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쫑런은 사직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피한 리쫑런에 반해 바이충시의 처지는 곤궁하였다. 그에게는 병력이나 정치적 기반이 사라졌으며 장제스의 처분만 바라는 처지였다.

    바이충시와 리쫑런

    1950년 5월 바이충시는 ’총통부 전략고문위원회‘ 부주임이 되었다. 이름뿐인 자리로 바이충시는 늘 정보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바이충시 공관에는 타이완 정보당국인 보밀국 파출소가 설치되어 행동을 감시했다. 그후 바이충시는 국민당의 중앙위원이나 상무위원은 물론 평의회 위원에서도 제외되어 형식적인 예우마저 사라졌다. 그로부터 바이충시는 좌불안석의 처지가 되어 울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1966년 12월 2일, 바이충시가 침실에서 사망한 것을 부관이 발견했다. 장제스가 자객을 보내어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공식적으로는 심장병으로 발표되었다. 그때 바이충시의 나이가 74세였는데 그의 처지에 비하면 천수를 누린 셈이 되었다. 장제스는 직접 상가에 가 조의를 표했으며 국방부가 주관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허잉친이나 쑨커, 천리푸, 구쭈통 등 국민정부 요인들이 모두 장례위원이 된 것을 보면 나름대로 예우를 하였다고 할 것이다. 국민당은 요인이 죽으면 묘지를 대륙 쪽으로 향하게 하여 ’반공대륙‘의 의지를 보이곤 하였다. 바이충시의 묘지도 전례에 따라 대륙 쪽으로 배치되었다.

    신중국의 혼란과 수습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다음 날 소련이 처음으로 중국을 승인하였다. 공산 국가들이 그 뒤를 따랐으며 인도, 버마, 스리랑카, 영국, 프랑스 등이 중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미국은 1979년 1월 1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중국 정부를 승인하였다. 1968년까지는 타이완의 국민정부를 승인한 국가가 중국을 승인한 국가보다 더 많았다. 하지만 1974년이 되면 80개 국가가 중국을 승인하여 32개국에 지나지 않는 타이완을 압도하였다. 국제관계에서 강약이 부동한 것은 엄중한 현실이었다.

    처음에 중국은 마오쩌둥이 주창한 ’신민주주의론‘에 따라 정부를 구성하였다. 소련처럼 노동자 계급독재가 아닌 ’계급연합‘ 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경제정책도 전면적인 국유화와 계획경제가 아닌 국영과 농업경제, 사영경제로 시작하였다. 어쨌든 중국은 정부 수립 이후 내전 기간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경제도 물가를 잡는 등 최소한의 안정을 되찾았다. 노동자들에게는 상품가격에 따른 임금 변동제도, 즉 실물환산 급여제’를 실시하여 구매력을 보장하였다.

    1950년 전면적으로 실시된 토지개혁은 저항하는 수많은 지주들의 희생을 가져왔다. 규탄대회에서 비판을 받은 지주와 부농들은 공개재판 뒤 즉시 총살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은 진통을 거쳐 1952년말 토지개혁이 완료되었다. 이때 3억명의 농민들이 토지를 새로 분배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1953년이 되자 중국 정부는 곧바로 집단화 운동을 일으켰다. 함께 노동하는 단위인 ‘호조’와 ‘합작사’를 설립하여 토지를 집단화하고 농기구와 노동력까지 집단화하였다. 법적으로 여전히 농민의 소유였지만 농민의 입장에서는 다시 몰수한 셈이었다. 1956년 말까지 대부분의 토지가 합작사에 속하게 되었다. 이 합작사는 1958년이 되면 다시 인민공사로 개편되었으니 변화에 보수적인 농민들로서는 눈이 핑핑 돌아가는 대변혁이 아닐 수 없었다.

    1958년 정국 지도부는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고 인민공사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958년 2월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강철은 19퍼센트 증산하고 전력은 18퍼센트, 석탄은 17퍼센트 증산하자.”고 호소했다. 말이 호소이지 방침을 결정한 것이다. 계획은 머리가 뜨거워진 지도부에 의해 점점 올려 잡게 되었다. 마오쩌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강철은 처음에 620만 톤이었다가 8월에 1,070만톤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문제는 중국의 낙후된 공업설비였다. 중국은 대규모 용광로는커녕 현대식 용광로가 아예 없었다. 정부관리, 농민, 노동자, 교수등 모든 사회 계층이 용광로 건설에 달려들어 1958년 말까지 60만개의 소형 흙 용광로가 세워졌다.

    장리머우가 감독한 영화 ‘인생’을 보면 이 시기의 사회상이 잘 드러난다. 멀쩡한 농기구를 모아 녹여 쓸모없는 선철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강철 생산방식은 곧 엄청난 재앙을 몰고 왔다.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데다 천재지변까지 겹쳐 수천만 명이 아사하는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전쟁 지도와 전략 수립의 천재 마오쩌둥은 경제건설의 천재가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권력을 잃을 처지에 놓였다. 1959년 8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장시성 루산에서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국가 주석을 류샤오치에 넘겨주고 조금 뒤로 물러앉아 있었다. 류샤오치를 비롯한 새 지도부는 마오쩌둥보다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경제정책을 수립하여 난국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경제를 사실상 책임지고 있던 천윈은 인민공사를 합작사로 되돌리고, 실제적인 경제발전 계획을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회의 분위기는 새 지도부의 제안대로 흘러갈 조짐을 보였는데 마오쩌둥은 불쾌했지만 꾹 참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하고 다혈질인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판을 뒤엎어 버렸다. 뒤늦게 회의에 참석한 펑더화이는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는 의견서를 마오쩌둥에게 전달하였다. “인민공사와 흙 용광로 20만개는 지나치다. 그리고 관료주의가 경제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펑더화이는 회의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여 참석자들의 공명을 이끌어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의견서를 인쇄하여 전체 참가자들에게 배포하고 전면적으로 펑더화이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공자도 실수하였고 마르크스도 잘못한 적이 있다. 레닌의 친필원고도 곳곳에 고친 흔적이 있다. 나는 경제에 대하여 잘 모르며 공업경제는 더 모른다.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으니 욕하려면 나를 욕하라.”고 자책하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가슴속에는 불길이 훨훨 타올랐을 것이다.

    펑더화이의 반당음모를 게재한 런민일보 기사

    마오쩌둥의 강력한 비판 속에 펑더화이는 실각하였다. 그후 류샤오치를 비롯한 새로운 지도부는 농민들에게 자작 경지를 허용하는 등 경제정책을 수정했으나 얼마 가지 못하였다. 마오쩌둥은 이미 1962년에 류샤오치를 비롯한 지도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자 류샤오치는 중소 동맹을 복원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1965년 1월 당대회에서 류샤오치의 후계자 자격을 박탈하고 중국 공산당을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문화대혁명의 전주곡이 울린 것이다.

    문화대혁명 이후의 중국 이야기는 더 간단히 줄이기로 한다.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기로 했던 마오쩌둥의 처 장칭이 4인방의 하나가 되어 날뛴 것, 10대 원수 대부분이 홍위병을 비롯한 조반파의 행패에 대하여 마오에게 호소했다가 역풍을 맞은 것, 펑더화이의 뒤를 이어 국방부장이 되었다가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된 다음 소련으로 탈출하다 일가족이 추락사한 린비아오 등 엄청난 사건들이 뒤를 이었다. 린비아오가 쿠데타 음모를 계획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석연치 않다. 10년간 문화대혁명의 폭풍이 몰아친 뒤 1976년 9월 9일, 마침내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저우언라이는 그보다 8개월 전인 1월 8일에 사망했다.

    마오쩌둥의 죽음 텐안먼에 조기가 걸려 있다.

    4인방 분쇄의 주역 예젠잉(좌측)과 덩샤오핑

    마오쩌둥의 사망은 그에 의지하여 권력을 휘두르던 장칭과 4인방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화궈펑은 군부 내 상징적인 지도자이던 예젠잉과 모의하여 장칭과 4인방을 무혈 체포하였다. 마오쩌둥의 경호 책임자이던 왕둥싱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작전은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었다. 마오쩌둥에 의해 실각과 복귀를 되풀이하던 덩샤오핑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저우언라이가 일찌감치 점을 찍어 후원하고 보호하던 덩샤오핑은 화궈펑을 평화적으로 밀어낸 뒤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국공내전은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사망에 따라 과거의 역사가 되었다. 덩샤오핑에 의해 중국의 물줄기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 뒤의 중국에 대하여는 독자 여러분들이 필자보다 더 잘 알고 있을테니 한 줄이라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원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감사의 인사>

    이로써 70회를 간신히 마쳤습니다. 매회 7쪽에서 12쪽에 이르는 분량을 편집하여 지면에 옮겨주신 레디앙 정종권 편집장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오랜 기간 귀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이근원 대표를 비롯한 레디앙 관계자들에게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본래 귀촌하기 전 연재를 마칠 계획이었는데 건강상 문제로 두 번이나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이라 독자의 기호를 무시한 채 마음대로 썼습니다. 초고이므로 자료에 충실하고자 하였고 역사적 사실을 추구하였습니다. 선정적인 에피소드는 가급적 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장제스 평전’에 부인인 쑹메이링이 미국 대통령 후보이던 듀이와 추문이 있었다며 구체적인 묘사도 있었지만 저는 그런 게 싫었습니다. 그런다고 역사적 사실이 바뀌지도 않을 뿐 아니라 쑹메이링의 역할이나 평가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70회를 완독한 독자가 있다면 정말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한 번이라도 읽으신 독자가 있다면 저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제 초고를 마쳤으므로 곧 수정작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간결하고 재미있게 재구성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할 예정입니다. 레디앙과 독자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4월 14일 해남에서 이철의 드림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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