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전』⑦
    (7회차) 5월, 유정을 만나다
        2021년 05월 02일 11: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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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회] 도화빛 교정과 4.13 호헌 조치

    (7회차) 5월, 유정을 만나다

    중간고사가 끝난 4월 말의 어느 날 그는 교문으로 나가려다 정문에서 학생들과 전경들이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체육관 쪽으로 우회하여 나가기로 했다. 옆에 있던 고등학교 동문 친구 우문석이 말했다. “야, 김민수. 너 저 앞에 나가서 욕 몇 마디하고 와. 그럼 전경들이 맛이 가서 돌아가지 않을까? 너 욕 몇 마디로 뚱땡이도 맛을 보냈었다며.”

    “야. 쟤들 열 받아서 페퍼포그 쏘면 어쩌려고. 그 지랄탄이라는 게 정말 지랄 맞게 독하다던 데. 그리고 나 손 씻었어.”

    “뭔 얘기야?”

    “엉아는 욕과 완전히 단절했단다. 욕 안 한 지 두어 달 되었어.”

    그 날 민수는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고 며칠간 외출을 금지 당했다. 그의 책상 위에 있던 어떤 시를 아버지가 읽었던 것이다. 그 시의 제목은 <한라산>이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서시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지리산에서
    무등산에서
    그리고 피어린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녹두서평 1. 김남 외/ 도서출판 녹두/ 1986년)

    그의 아버지는 다음 구절을 읽다가 그 시가 담긴 복사물을 찢어버렸고 아들을 계도하기로 결정했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은 그렇게 갔다.
    미제의 각을 뜨다가
    적들의 심장에 불을 지르다가
    끝내 다 뜨지 못한 채
    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
    한줌 피 묻은 뼛가루로 날아갔다.

    “미제의 각을 뜨다”는 말은 북한의 용어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민수는 그 때는 몰랐지만, 인민군에 입대하고 사라진 형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평생동안 직장에서 진급 한 번 못했던 그의 아버지는 분노와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민수는 그 시를 읽지도 못하고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기만 했다.

    민수는 왜 아버지가 화를 냈는지 몰랐지만 가택 연금이 풀린 5월 초에 그 시를 다시 구해 읽어보았고 어느 정도는 아버지를 이해했다. 민수는 그 시의 내용에 어느 정도는 빠져들었지만 사실 좀 무서움을 느꼈다. 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이 특히 그를 두렵게 했다.

    저 간악한 미제의 각을 뜨고
    저 미친(美親) 매국노들의 심장에 불벼락을 안겨주자!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한 조국의 영혼들에게
    적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동지들의 원수를 갚아주자!

    민수는 4.3 항쟁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녹두서평 1>을 읽기 시작했다. 전자는 읽을 만했고, 후자는 그에게 너무 어려웠다. 그는 책을 읽고 학교 이곳저곳을 다니며 1980년 광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5월은 광주항쟁의 달이었지만 민수에게는 소희가 승준 등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밟혔던 달이었다. 이제 소희는 광주의 소녀가 되었고 승준은 계엄군 공수부대가 되었다. 민수는 1980년에 일어났던 비극과 1982년에 일어났던 비극을 생각하며 5월 초를 보냈다.

    민수에게는 큰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억력이었다. 그는 잘 외웠고 결코 잊지 않았다. 잘 외우는 능력은 그가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소위 ‘암기과목’이라고 불리는 과목들에서 그를 매우 돋보이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그는 중고교 시절 보았던 세계사 시험에서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고3 때 매달 모의고사를 보았음을 고려하면 열다섯 번이 넘는 시험에서였다.

    그의 암기력은 인간관계에서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상대방의 이름을 얼굴과 금방 매치시킬 수 있었고, 학생들의 전화번호, 사는 곳, 생일 등을 아주 잘 외웠다. 그는 대학 입학 30년 후에도 동창생들의 그 당시 전화번호나 생일 등을 줄줄이 외워댔다. 자신의 이름을 빨리 기억해주고 자신의 생일을 외우고 있고 자신의 출신 학교나 사는 곳, 지방학생의 경우에는 살던 곳을 잘 기억하는 이 아이를 많은 여학생들은 기특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는 잘 잊을 수 없었고 이는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어떤 건물을 보거나 어딘가를 지나가거나 어떤 냄새를 맡거나, 어떤 달이나 날짜가 오면 떠오르는 과거의 고통스런 일들에 그는 어려움을 겪곤 했다.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라기보다는 소희가 고통을 당했던 날이었고 시월은 박정희가 죽기도 했지만 정한광이 민선을 괴롭혔고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브래지어를 착용해 보았던 달이었다.

    그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초록의 달 오월에 처음으로 소개팅이라는 것을 했다. 소개팅 장소에 나가기 전 사실 그는 불안했다. 그는 목소리에 민감했는데, 소개팅을 할 여학생이 대구 출신이라는 얘기를 나중에 주선자에게 전해 듣고 기대감이 뚝 떨어진 것이었다. 그는 어떤 특수한 경험 때문에 경상도 출신 여학생들에 대한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실제로 본 여성들 중 배우들을 제외하고 가장 예뻐 보였던 한 부산 출신 여학생이 그에게 다가와 다소 굵은 목소리와 낮은 톤으로 말했었다. “니가 민수가?” 순간 그는 얼굴이 다가 아니며 자신이 경상도 출신 여학생과 사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소개팅 장소에 나타난 이화여대 영문과 1학년 김유정은 그의 눈에 엄청나게 예쁘게 보였다. 크고 둥근 눈과 도드라진 쌍꺼풀과 웃는 인상을 가진 유정은 민수를 매혹시켰다. ‘하지만 얼굴이 다가 아니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던 민수는 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깜짝 놀랐다. 이 젊은 여성은 목소리마저 매력적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소위 표준어에 가까운 말을 썼고, 살짝 비음이 섞인 ‘예쁘고 고운’ 목소리를 지녔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그는 들어보았었지만, 그가 진짜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진짜로 첫눈에, 그리고 ‘첫 귀에’ 반했다. 그리고 그것은 조용원에게 반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 배우는 자신과 다른 세상에 있는 존재였지만, 눈앞의 이화여대 신입생은 자신의 세상 안에 있는, 친구로서 혹은 이성으로서 사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유정은 민수를 보며 그가 자신이 보던 남자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대구 출신인 그에게 민수의 목소리나 어조는 처음 느끼는, 알 수 없는 어떤 매력을 지닌 것 같았다. 음의 고저는 별로 없는 것 같지만 부드러운 말투.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민수가 말하는 방식은 그가 처음 보는, 혹은 듣는 여러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민수는 마치 미국인들처럼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그는 미국인들처럼 영어를 발음했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어 발음이었다. 민수는 언어를 뜻하는 ‘말’을 장음으로 발음했고, ‘네가’를 ‘니가’가 아니라 실제로 ‘네가’라고 발음했다. 가수 혜은이를 ‘혜은이’라고 불렀고, 폐를 ‘폐’로 발음했다. 유정 자신은 그 가수를 ‘해은이’로 불렀고 폐를 ‘패’로 발음했었다. 유정에게는 그의 말투가 예쁘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가 보기에 민수는 눈에 띄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고 하얀 피부를 지녔다는 점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민수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말을 잘한다는 느낌 또한 받았다. 그는 민수를 몇 번은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민수는 세 번째 만남에서 유정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노튼 앤솔로지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

    민수는 그 날 유정과 <노튼 앤솔로지>처럼 2,000 페이지가 넘는 책은 처음 봤다는 등 영문학과 학생들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유정을 웃기기 시작했다.

    “노튼 앤솔로지, 아니 앤딸러쥐[ænθάlədʒi] 그거 용도가 다양할 것 같아. 목침으로도 쓸 수 있고, 무기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아마 벽돌 대신 써도 될 걸.”

    유정이 웃으며 좋아했다. “벽돌. 호호. 진짜 벽돌 같아.” 민수는 영문과 학생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몇 마디 말을 더 하다가 이번에는 자신이 들은 가장 웃기는 이름 얘기를 해주었다.

    “이거 농담 아니라 실화야. 어떤 애 이름이 이지거든.”

    “이지? 이름 괜찮다. ‘이지적’인 느낌을 주려고 그렇게 지었나?”

    “그런데 걔 동생 이름이 이쉬운이야. 이지. 이쉬운.”

    유정이 배를 잡고 웃었고, 민수는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그는 분위기가 좋다고 판단하고 며칠 동안 고민하고 연습한 대사를 유정에게 읊어주었다.

    “유정아. 첫날에도 이 얘기 하고 싶었는데 그날은 쑥스러워서 이야기 못했어. 너는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제일 예뻐. 너는 최수지보다 43만 6천배 더 예뻐.”

    사실 거짓말이었다. 그가 그때까지 본 사람들 중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여전히 조용원이었다. 물론 그는 1985년의 교통사고로 성형을 해야만 했고 고등학교 때보다는 조금 덜 예쁘게 변했지만.

    이 느끼하다면 느끼할 수 있는 말을 유정은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와.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한 민수는 기회가 왔다고 느끼며 역시 미리 준비한 재주를 부렸다. 그는 유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장소, 이대 앞의 어느 술집에서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던 노래였던 돈 맥클린의 <빈센트, Vincent>를 불렀다. 당시에 대학가 술집들에서는 노래를 불러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수준급의 가창력은 유정을 매혹시켰다. 그리고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졌다.

    “And when no hope was left inside
    On that starry, starry night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But I could have told you, Vincent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유튜브 링크)

    “그리고 어떤 희망도 남지 않았던 그 별이 빛나던 밤에 당신은 연인들이 종종 그러는 것처럼 자신의 목숨을 끊었죠. 하지만 나는 (만일 과거에 내가 당신을 만났었다면) 당신에게 말할 수 있었을 거예요. 이 세상은 당신처럼 아름다운 이를 위해 의도된 곳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이대생으로 보이는, 건너편에 앉아있던 대학생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미국에서 살다가 돌아와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말할 수 있었고 가사 내용을 다 알아들었던 유정은 살짝 눈물을 흘렸다. ‘무뚝뚝한 대구 남자들’ 사이에서 자란 유정은 부드러운 말투로 자신의 외모를 희한한 표현을 사용해 칭찬하는 이런 종류의 아이를 처음 보았고, 게다가 그 아이는 노래도 잘했고 감동적인 가사를 지닌 노래를 외우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있던 호감이 강해졌고 그의 가슴은 알 수 없는 뭉클한 느낌들로 채워졌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가사 중 하나인 이 부분에 눈물을 흘리는 유정에게 민수는 다시 한 번 반했다. 이 아이는 얼굴과 목소리가 예쁠 뿐 아니라 감성도 풍부하고 예술적 감수성도 지니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if 절이 생략되고 주절의 could have 과거분사가 가정법임을 알려주는 과거완료 시제]를 공부하다가 익혔던 이 아름다운 노래가 유정 또한 자신에게 반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드물게 고등학교 선생님을 속으로 칭찬했다. 고2 때 영어 선생님이 그에게 추천한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

    유정이 말했다. “이 노래 너무 좋아. 제목이 뭐야? 스따리 나잇?”

    “아니 그건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제목이고 노래 제목은 빈센트야.”

    “아, 고흐 이름이구나. 이렇게 예쁘고 가사도 감동적인 노래는 처음 들었어. 고마워. 이런 노래 알려줘서. 그리고 너 노래 정말 잘한다.”

    “음. 내가 생각해도 좀 잘해.”

    “호호. 보통 이러면 ‘과찬의 말씀입니다.’고 답하던데 너는 다르네.”

    “그래서 싫어?”

    “아니, 뭐랄까, 매력적이야.”

    그렇게 말하며 유정은 미소를 지었고, 민수도 그 미소를 따라했다. 유정의 미소는 잠시 후 궁금해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고, 그는 민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민수 너도 미국에 살았던 적 있어?”

    “아니. 한국에서만 살았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발음이 좋지? ‘could have told you’를 너처럼 미국인과 똑같이 발음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대개 ’쿠드 해브 톨드 유’처럼 하는데 너는 ‘쿠드브토울쥬’라고 했어. 신기해.”

    “맥클린이랑 똑같이 발음하려고 애쓴 결과니까 신기한 건 아니야.”

    “하긴 그 정도 부르려면 수십 수백 번 따라 불렀겠지. 나 이 노래 가지고 싶어. 우리 이 노래 카세트 사러 가자.”

    이대입구 역 근처의 한 레코드점에서 빈센트가 담긴 카세트를 산 유정에게 민수가 로버타 플랙의 <킬링 미 소프틀리> 앨범 카세트를 사 주었다.

    “이건 누구야? 로버타 플랙? 처음 듣는데.”

    “로리 리버맨이라는 가수가 있었는데 맥클린이 빈센트를 부르는 것을 듣고 반해서 이 <킬링 미 소프틀리>, 아니 원어민 발음으로 하자. <킬링 미 소플리>라는 노래의 가사를 썼대. 그 가수가 이 노래를 발표했는데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로버타 플랙이 다시 불렀는데 이번에는 빌보드 차트 1위를 했어. 그러니까 이 노래는 빈센트에 대한 일종의 답가야.”

    “별 걸 다 안다, 넌. 이제 가자. 집에 가서 둘 다 들어봐야지.”

    그들은 긴 길을 나섰다. 이대 입구 역에서 지하철을 탄 그들은 아현 방향으로 타고 44분간 2호선을 반 바퀴 돌아 선릉역으로 이동했고, 거기에서 다시 11번 버스를 타고 개포동으로 향했다. 유정은 대구 출신이었고, 여자아이를 혼자 둘 수 없다는 부모님들의 생각 때문에 학교와 엄청나게 먼 개포동의 친척집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유정을 집에 바래다준 그는 다시 버스를 타고 선릉역에서 내린 후 지하철을 타고 독립문으로 돌아갔다. 민수에게 그 긴 여정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손오공의 근두운을 빌려 타고 하늘로 오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근두운은 심지어 장미꽃과 복숭아꽃으로 장식되기까지 했다.

    집에 도착한 그에게 유정의 전화가 왔다. “<킬링 미 소프틀리>도 아주 좋아. 내가 이 노래 연습해서 네가 빈센트 부르면 내가 답가 불러줄게.”라고 유정은 말했다. 전화를 끊은 후 그는 바닥을 구르며 손으로 방바닥을 치며 좋아했다. 누나가 방에 오더니 미친놈 보듯 그를 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드디어 네가 연애라는 걸 하는구나.”

    5월 18일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호헌철폐를 주장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축소를 규탄하는 대학가의 시위는 들불처럼 퍼져갔다. 민통련, 종교계, 민추협과 야당인 통일민주당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세력들이 결집해 만들어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정당이 차기 대통령 후보를 선정하는 전당대회가 있을 6월 10일에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주최하려 하였다.

    5월 말 도서관에서 기말고사 준비를 하고 있던 민수는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와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비어가는 도서관과 채워지는 아크로, 관악 학우 단결하여 민주주의 쟁취하자.” “고문살인 은폐 조작, 군부독재 타도하자.” 민수는 그들을 이해했지만, 어쩌면 이것은 야만이라고 생각했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구호를 외치다니.

    공식적으로는 6월 10일에, 실제로는 5월 말에 시작된 6월 항쟁은 예측을 뛰어넘은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수백만의 인파들이 곳곳의 도시들에서 시위를 벌였고 전경들이 학생과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방패를 빼앗기는 등의 전두환 시대 그 어느 때에도 없던 일들도 일어났다. ‘넥타이 부대’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한국 역사상 아마 최초였을 택시 기사들의 자동차 경적 시위도 생겨났다. 그러나 민수는 항쟁에 불참했다. 아마 절반은 폭력 혐오 때문이었고, 절반은 유정에게 푹 빠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조용히 집과 학교와 이대 앞과 개포동을 다니며 일 학기를 마쳤다.<계속>

    필자소개
    정재영(필명)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작가이다. 저서로는 「It's not Grammar 이츠낫 그래머 」와 「바보야, 문제는 EBS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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