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권 분립, 대간 그리고 언론
    [컬렉터의 서재] 정치제도 공부를 회의하는 너에게
        2023년 06월 02일 10: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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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에게.

    그동안 잘 지냈니? 오늘 이렇게 펜을 든 이유는 오래 전 너의 질문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야. 언제였던가 너는 내게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정치 제도를 공부할 때 이 기구는 뭐 했고, 저 기구는 뭐 했고 이런 것들을 막 외우잖아요? 그런데 그게 왜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외워야 하는 거예요? 이런 거 달달 외우라고 하니까 국사 공부가 점점 더 하기 싫어져요.”

    다른 급한 일 때문에 나는 너에게 일단은 외워두라고만 하고 다음에 따로 시간을 내서 설명해 주겠다고 했는데, 결국 그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말았다. 어쩌면 지금은 40대가 되었을 너는 이런 질문을 했는지조차 기억을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네 말이 정확히 맞다. 정치 제도사를 가르칠 때, 너의 답답함은 곧 나의 답답함이었다.고려나 조선시대 정치 제도사에서 나는 ‘대간(臺諫)’이라는 개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단다. 그런데 이게 교과서에서는 거의 강조되지 않아. 이 대간이라는 개념을 빼고는 고려, 조선의 정치 제도사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데도 말이야. 너는 중서문하성, 중추원이나 의정부, 승정원 이런 기구들의 이름은 배운 기억이 나도, 대간이라는 용어는 무척이나 생소할 거야. 너만 그런 것이 아니니 그리 자책할 필요는 없다. 내가 역사를 좋아하는 그래서 사극도 즐겨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대간을 이야기하면 그들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게 뭐냐는 반응을 보인단다. 그래서 나는 고려와 조선의 정치 제도에서 빠뜨릴 수 없는 개념인 대간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너의 질문에 대한 나의 뒤늦은 답변이기도 하다.

    D야.

    너도 배웠다시피 보통 역사 수업에서는 국왕 업적이 나오기만 하면 ‘왕권 강화’가 강조되곤 하지. ‘왕권 강화’라는 개념은 전근대 역사를 공부할 때 마치 전지전능한 해결사인 것처럼 등장하고 시험 문제에도 왕권 강화를 이룬 왕들이 주로 출제된다. 그래서 왕권을 강화했으면 훌륭한 왕, 왕권이 약화되면 무능한 왕으로 인식될 정도지. 나는 역사 교과의 이런 경향이 혹시 옛 역사에서 왕권 강화를 신앙화함으로써 현재의 독재 정치를 합리화하려는 권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해본단다. 그도 그럴 것이 교육 내용이라는 것에는 흔히 그 시대 사람들의 주된 관심과 함께 권력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도 반영되기 때문이지.

    예를 들어보자. 한때 교과서에서 화백회의 의사결정 방식이 만장일치였다는 사실이 무척 강조된 적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 고유의 토착화된 민주주의의 전통이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왜 그렇게 만장일치를 강조했을까? 그것이 실은 박정희 유신 시대의 독재 체제를 합리화하는 논리였다는 것!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로 대통령을 선출하던 방식을 가장 완벽한 한국적 민주주의의 구현이라고 선전하던 그 말도 안되던 독재를 분식하는 데 화백회의의 만장일치 의사 결정만큼 유용한 역사적 소재가 어디 있었겠니? 이렇게 만장일치로 대통령을 뽑아야만 국력의 낭비를 막고, 총화단결로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겠고.

    [사진] 1972년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제8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2359표 중 무효표 2표를 제외하고 99.9% 지지를 받아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것이었다.

    이렇게 역사교육조차 완전히 가치 중립적일 수는 없는 셈이지. 남북의 분단 현실 역시 역사적 사실을 취사선택하고 자기 쪽에 유리하게 사실을 왜곡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3.1운동 당시 주로 외쳤던 구호 “조선 독립 만세!”만 해도 그래. 북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줄여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게 되면서 남쪽에서는 ‘조선’이란 용어가 불온시돼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퇴출하는 바람이 불었는데, 이것이 역사 교육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단다. 3·1운동 당시 구호였던 “조선 독립 만세”가 교과서에 실릴 때 “대한 독립 만세”로 바뀐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야. 비단 역사 교과서만 그럴까?

    심지어 시대적 혹은 사회적 현실과 가장 거리가 있을 법한 산수(수학) 교과서도 그래. 어떤 산수 교과서의 내용이야. 첫 번째는 북한의 산수 교과서, 그 아래는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파키스탄 산수 교과서에 실렸던 내용이야.

    “철수와 영희는 우리의 철천지 원쑤 미국놈들을 맞닥뜨려 철수는 8 놈을 찢어 죽였고, 영희는 3 놈을 때려 눕혔습니다. 누가 원쑤놈들을 몇 놈 더 쳐부쉈나요?”

    “소련군 세 명 중 한 명이 전사에게 죽었다. 남은 소련군은 몇 명인가?”

    심지어 산수 교과서가 그럴진대 역사 교육이 혼자 가치 중립적일 수는 없었어. 이처럼 우리는 어떤 시대적 상황과 권력의 뜻에 따라 역사에서 ‘왕권 강화’가 오로지 선이었다고 배웠고, 한걸음 더 나아가 ‘중앙집권 강화’도 그렇다고 배웠다. 물론 우리나라 역사 경험상 대다수의 나라가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고, 중앙집권체제가 거대한 중국세력과 인접하여 생존상 유리했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선악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단다. 그건 선택의 문제인 거지. 만약 그렇다면 폴리스라는 지방분권체제를 유지했던 그리스는 덜떨어진 역사였고,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 로마가 발전한 체제였다는 결론밖에 안 나오는 거지. 게다가 지금은 지방 자치를 강조하는 시대니 무조건 중앙집권이 우월한 것으로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니?

    어쨌든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 강화’를 얼마나 중요하다고 배웠는지 학생들 중에는 이 두 개가 같은 개념인 줄로 착각하는 친구들도 있어.

    ‘왕권 강화 = 중앙집권 강화’

    그런데 이건 서로 영역이 다른 거잖아. ‘왕권 강화’는 귀족과 신하에 대하여 왕의 힘이 강해졌다는 뜻이고, 중앙집권은 중앙 권력이 지방에 대해 가지는 통제력이 강하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보통 왕권이 강화되면 중앙집권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야. 예를 들어 고려 광종 때를 보면 왕권은 강했지만, 아직 지방관이 파견되기 이전이므로(성종 때 처음 파견) 중앙 집권이 매우 허약했단 말이지. 아! 이런 예가 좋겠구나. 날씨가 ‘맑다’와 대비되는 개념은 ‘흐리다’고, 날씨가 ‘덥다’와 대비되는 개념은 ‘춥다’지. 그러니까 날씨가 맑고 더울 수 있듯이, 맑고 추울 수도 있다는 말이야. 왕권의 강약 여부와 중앙 집권의 강약 여부는 그런 비유에 맞춰 이해하면 될 것 같아.

    D야.

    학생들이 우리 역사에서 ‘왕권 강화’의 주술에 얼마나 강하게 사로잡혀있는가 하면 말이야 고려와 조선시대 정치이념이었던 ‘유교 정치이념’에서 추구한 가치가 뭐였는지 질문하면 대부분의 학생이 “왕권 강화”라고 답한단다. 과연 왕권 강화가 선(善)이라고 배운 학생들다운 대답이지. 오늘날 누군가 독재 권력을 추구하는 이가 있어, 학생들의 저런 생각들을 듣는다면 매우 흡족해할 것이다. 왕권 강화가 사회 혼란을 극복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구현하는 선이었다면, 대통령의 강력한 독재 체제도 바로 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교 정치 이념에서 추구한 진정한 가치는 왕권 강화가 아니란다. 물론 유교가 ‘신하의 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므로 왕권 강화를 추구한 것은 맞지만, 그게 다가 아니란 거지. 그렇게 반만 쳐다봐서는 유교 정치이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없어. 그렇다면 유교 정치이념은 무엇을 추구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뒤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이 유교 정치이념에 대한 이해가 쉽도록 오늘날 우리가 채택해 쓰고 있는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해보자.

    민주주의 정치 이념과 삼권분립

    D야.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정치이념은 민주주의 이념이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이념에서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뭘까?

    “국민의 자유와 평등”?

    맞아!
    인간 존중과 자유, 평등 추구야.

    그렇다면 이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한 민주주의 원리는 무엇일까? 정답은 ‘견제와 균형’이야. 권력의 집중과 독점을 방지하겠다는 거지.

    그럼 어떻게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그 방법론을 제시한 사람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몽테스키외(1689∼1755)라는 인물인데, 그는 삼권분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견제와 균형을 구현하려고 했단다.

    그의 삼권분립 개념은 로마 삼두정치에서 영향을 받았단다.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 정치체제인 삼두정치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한 그는 집정관이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어났는데 왜 로마의 공화정은 몰락하고 오히려 제정이 되었는가를 진지하게 연구했어. 그 결과 그는 세 명이든 네 명이든 권력자가 입법, 행정, 사법 등 국가의 모든 기능을 틀어쥐면 결국 권력자들끼리 암투가 벌어져 누가 이기든 최후의 1인에 의한 독재는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설령 권력자가 한 명만 남지 않고 계속 두 명 이상이라 해도 그들이 국가의 모든 기능을 틀어쥐면 1인 독재보다 더 심각한 군벌들의 암투로 시민이 고통받게 된다고 본 거지. 그래서 그는 단순히 권력자가 둘 이상이라는 것만으로 시민의 권익이 보호될 수는 없으며 아예 권력의 기능을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이렇게 셋으로 분산시켜서 각각의 권력자에게 따로따로 나눠 가지게 한 후, 서로 견제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면 로마의 공화정은 붕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차 삼두정치의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2차 삼두정치의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각각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중 어느 하나씩만 행사했다면 한 명의 황제가 모든 권한을 휘두르는 정치체제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하려면 단순히 복수의 권력자가 아니라 아예 국가의 권력 기능을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셋으로 나누어 서로 견제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 왼쪽은 『법의 정신』을 통해 삼권분립 개념을 제시한 몽테스키외, 오른쪽은 대한민국에서 삼권분립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도식화한 그림이다.

    몽테스키외의 사상에서 출발한 삼권분립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나누어 일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국가 기관들이 권력과 역할을 나누어 가지면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 있는 정치를 할 수 있게 되고, 이에 따라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할 수 있게 된다는 거지. 입법권은 법을 제정하고, 행정권은 그 법을 집행하고, 사법권은 어떤 문제에 대해 법을 적용하여 판단을 내리는 역할을 맡는다. 한국의 경우 입법권은 국회가, 행정권은 정부가, 사법권은 법원이 각각 행사한다. 이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지도에다가 대입해보면, 입법 권력은 여의도에, 행정 권력은 서울 종로구 청와대(현재는 잠시 용산 대통령실), 사법 권력은 서울 서초구에 위치하여 지역적으로도 어느 한쪽에 힘이 몰리지 않고 서로 견제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 시간 개념을 적용해 보면 입법권은 미래에 대한 구상을 하는 일이므로 미래를, 행정권은 지금 현재의 행정을 행하는 것이므로 현재를, 사법권은 일어난 사안에 대한 법 적용에 대한 일을 하므로 과거를 상징한다. 입법·행정·사법은 이렇게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개의 시간의 축이 상호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도 하단다.

    삼권 분립 이야기를 2016년과 17년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건과 관련해서 이야기해보자. 먼저 문제를 일으킨 쪽은 행정부의 수장인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최순실이라는 비선을 통해 국정을 운영했다는 사실이 폭로된 거지. 이에 대해 입법부인 국회는 2016년 12월 9일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이는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 탄핵 소추안 가결로 대통령 탄핵이 바로 확정된 것은 아니야. 이 탄핵 소추가 입법부의 권한 남용이자 횡포일 가능성도 있잖아. 대통령은 별 문제가 없는데, 국회가 괜히 대통령 꼬투리를 잡아 다수 의석수로 밀어붙여 대통령을 탄핵 소추했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일단은 대통령의 직무를 일시 중단시키고, 그동안 국무총리로 하여금 권한을 대행하게 한 후 헌법재판소가 90일 기한 내에 입법부의 결정을 인용할지 기각할지 탄핵 소추안을 심판하는거지.

    헌법재판소가 뭐냐고?

    대한민국 헌법은 사법권을 원칙적으로 법원에 귀속시키면서도 헌법 제111조에서 별도로 헌법에 대한 재판권은 헌법재판소에 부여하고 있단다. 즉 일반 재판권은 법원이, 헌법 재판권은 헌법재판소가 나누어 가지는 것인데, 이 헌법재판소는 법원과 함께 대한민국 사법부를 이루는 헌법 기관인 거지. 이렇게 헌법재판소는 헌법 정신 및 헌법에 위반되는 모든 사항에 대해 심판하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의 경우 헌법재판소가 맡게 된 거야.

    이는 입법부의 대통령 탄핵 소추에 대해 사법 기관이 최종 심판을 하게 하여 입법부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사례로 이해하면 되겠다. 결국 국회가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킨 후 대략 석달 뒤인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 만장일치로 탄핵안을 인용함으로 입법부의 판단에 손을 들어주었단다. 2016년 10월 첫 촛불 시위로부터 시작되어 2017년 3월 대통령 파면으로 귀결된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은 겉으로만 보면 혼란처럼 비춰줄 수 있겠지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채택한 민주주의 정치 이념과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삼권 분립 시스템이 제대로 자라잡아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권력을 교체한 이 과정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점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량과 저력을 한층 빛나게 했다.

    ( * 대통령 탄핵심판이나 법률의 위헌 여부에 대한 최종 판단 권한은 우리는 헌법재판소가 다루지만 외국의 경우를 살피면 각 나라의 역사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탄핵 및 위헌 법률 판단을 다루는 기구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대통령 탄핵은 최종적으로 상원이 결정하고 법률의 위헌 여부는 연방 대법원이 판단한다)

    [사진] 왼쪽은 부산일보 2016년 12월 10일자 신문으로 ‘박 대통령 탄핵 가결’이라는 제목으로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오른쪽은 경향신문 2017년 3월 9일자 신문으로 ‘박근혜 파면 시민의 승리’란 제목으로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가 입법부의 결정을 최종 인용한 보도하고 있다. 이렇게 삼권 분립이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 제도가 정상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자료 모두 박건호 소장)

    유교 정치이념과 대간

    D야.

    앞에서 민주주의 정치 이념이 추구하는 가치가 견제와 균형, 권력의 집중과 부정 방지이고,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삼권 분립 체제를 갖추었다고 했다. 이제 민주주의 이념 대신 그 자리에 유교 정치이념을 집어넣어서 논의해보자.

    앞에서 던진 질문을 다시 해볼게.

    그렇다면 유교 정치이념에서 추구했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뭘까?

    당연히 사람들 사이에 인의예지신의( 仁義禮智信)의 윤리가 잘 구현된 유교적 이상 사회의 실현이겠지. 그렇다면 이를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정치 원리는 무엇이었을까?

    정답은 ‘견제와 균형’, 달리 말하면 ‘권력의 집중과 부정 방지’야.

    그래! 재미있게도 오늘날 민주주의 이념이나 유교 정치이념이 내세우는 정치 원리의 큰 줄기는 다르지가 않아. 다만 정치 철학의 차이에서 파생되는 세부 방법론이 다를 뿐이지, 그  추구하는 가치는 다르지가 않아. 고려나 조선시대에 삼권분립이라는 개념이 따로 있었을 리는 없었을 테고 말이야. 그렇다면 유교 정치이념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견제와 균형을 모색했을까?

    유교 정치이념에서 견제와 균형을 위한 방법론으로 선택한 개념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야. 나라는 ‘군신공치(君臣公治)’로 왕과 신하가 같이 다스려야 한다는 거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유교 정치이념에서는 왕에 대한 신하의 일방적 충성만 말하지 않아. 왕 역시 신하를 예(禮)로서 대해야 된다고 말함으로써 왕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유교 정치의 이상을 실현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유교 정치이념의 채택을 수용하자고 건의했던 고려시대 최승로의 시무 28조에도 왕의 이러한 덕목이 강조되고 있단다. 시무 28조 중 14조는 이상적 군주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는데, 군주는 교만해서는 안되고 신하를 공손하게 대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날로 더욱 삼가하여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신하를 접함에 공손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게 말로만 되는 게 아니라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겠지?

    그런데 그걸 우리가 만들려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이념을 채택하면서 서양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삼권분립의 개념을 거저 빌려와 썼듯이, 유교 정치이념을 처음 채택한 고려 사람들 역시 유교 정치이념을 만든 중국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그냥 손쉽게 가져다 쓰면 되는 거였어.

    그렇다면 중국 사람들이 만든 아이디어를 살펴볼 차례야.

    중국인들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위해서는 위에서 왕, 아래에서 신하 각각을 견제하면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어. 그래서 먼저 왕권을 견제하는 장치로 간쟁과 서경제도를 두었는데, 간쟁(諫爭)은 왕이 잘못하면 ‘아니 되옵니다’라고 따지는 제도이고, 서경(署經)은 왕이 사람을 임명할 때 동의하는 서명을 받아야 그 사람을 쓸 수 있는 제도로 국왕 인사권에 대한 견제 장치라고 보면 된다. 한편 신권을 견제하는 장치로 관리 감찰 및 탄핵제도를 마련했는데, 관리들의 비리와 부정을 적발해 처벌하는 제도란다. 그리고 이런 제도 마련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전담할 관리도 두었는데, 간쟁과 서경을 담담할 관리를 ‘간관(諫官)’, 관리감찰 및 탄핵을 담당할 관리를 ‘대관(臺官)’이라고 이름 붙였어.

    간단히 정리해보자.

    왕권 견제 : 간쟁과 서경 제도(간관諫官의 역할)

    신권 견제 : 관리감찰 및 탄핵제도(대관臺官의 역할)

    한국사에서 최초로 유교 정치이념을 채택한 나라는 고려였어. 지금부터 대략 천년 전인 10세기 말 성종(981-998) 때의 일이야. 고려는 이 이념과 함께 중국인들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위해 만든 이런 제도를 받아들였단다. 그럼 고려는 구체적으로 어떤 기구의 어떤 관리들에게 이런 왕권 견제와 신권 견제의 일을 맡겼을까?

    먼저 왕권 견제를 위한 간쟁과 서경 기능은 중서문하성의 3품 이하의 관리인 낭사들에게 맡겼어. 중서문하성은 그 안에 두 개의 관리 그룹을 두었는데, 2품 이상의 관리를 재신(宰臣)이라 해서 국가 정책을 심의하는 일을 맡겼고, 그 아래 낭사(郎舍)들에게 별도로 간쟁과 서경을 맡긴 거지. 비록 독립기구는 아니었다해도 이렇게 간쟁과 서경을 담당할 관리를 따로 두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띈단다. 이들에게 부여된 본업이 ‘왕권 견제’였던 거지. 그리고 신권 견제를 위한 관리 감찰 및 탄핵 기능을 담당할 부서로는 어사대를 두었어. 관리 감찰을 담당하는 기구는 고려시대 이전에도 있었는데, 통일신라시대 사정부가 그 역할을 했어. 어쨌든 이렇게 고려시대에는 중서문하성의 낭사가 간관으로 간쟁과 서경 기능, 어사대의 관원들이 대관으로 관리 감찰과 탄핵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막기 위한 나름의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 거지. 그렇다면 실제 기록 속에서 간관과 대관의 활동을 찾아보자.

    먼저 간관이 왕에 대하여 간쟁한 『고려사』 기록이야.

    간관이 상소하여 천수사의 창건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 『고려사』, 예종 7년 2월

    다음으로 어사대의 대관들이 관리를 탄핵하는 『고려사』 기록이다.

    어사대(의 대관)가 탄핵하기를 ‘대부경 왕희걸, 우사낭중 유백인, 예부낭중 최복규, 왼외랑 이응년이 서경에 분사하여 토지를 구하고 재물을 늘렸으니 청컨대 출면(黜免)하십시오’하니 따랐다.”
    – 『고려사』, 덕종 원년

    위 기록들을 통해 간관과 대관이 각각 어떤 식으로 왕권을 견제하고, 또 신권을 견제했는지 그 활동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이야.

    대간이 복합하여 논간하므로 이에 내시 14인과 다방 5인을 내쳤다.”
    – 『고려사』, 의종 6년 3월

    이 기록을 보면 대관도 아니고 간관도 아닌 ‘대간’이 같이 논간, 즉 간쟁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대간(臺諫)은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의 앞글자를 따서 부르는 말인데, 사료를 읽다 보면 대관, 간관이 따로따로 활동한 경우도 있지만, ‘대간’으로 함께 활동하는 기록들도 많이 나온단다. 이론적으로 보면 간관의 일은 왕을 향하고, 대관의 일은 신하를 향하므로 서로 하는 일이 구분되어 있는데도, 현실정치에서는 이론과 달리 이 두 관리가 흔히 세트 플레이를 했다는 거지. 다른 업무를 수행해야 했던 대관, 간관 두 관리 그룹이 어떻게 서로 이런 식으로 공동으로 협업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왕권을 견제하는 간관과 신권을 견제하는 대관의 역할은 이론적으로는 구분되어 있었지만, 그 일을 통해 구현하겠다는 상위의 목표는 동일했기 때문이야. 즉 그들은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방지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겠다는 공통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어. 그래서 대관과 간관은 함께 대간이라고 불렸고, 그들은 ‘간쟁과 서경, 관리 감찰과 탄핵 기능’을 함께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했던 일들, 즉 간쟁과 서경, 관리 감찰과 탄핵 등의 일들을 당시 사람들은 ‘언론(言論) 기능’으로 불렀다. 언론은 곧 말하는 것이다. 공론(公論;나라 사람 공공의 여론)에 입각하여 정치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곧 언론인데, 지금 우리가 언론하면 떠올리는 신문이나 방송 등과는 개념이 다소 다르게 쓰이지. 이렇게 대간이 언론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에 대간을 ‘언론을 담당하는 관리’란 뜻으로 ‘언관(言官)’이라고도 불렀단다. 다만 중국에서는 간관만 언관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대관까지 포함해 언관이라고 했다는 점은 우리나라 언관 제도의 특징이니 참고로 알아두렴.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내가 지금까지 내용을 표로 정리해볼게.

    고려를 이은 조선 역시 유교 정치이념에 따라 나라를 통치했어. 그러므로 조선도 고려처럼 유교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대간제도를 두었단다.

    먼저 왕권 견제를 위한 간쟁과 서경 기능을 수행할 기구로는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하부를 구성했던 낭사를 떼어 아예 독립기구로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사간원이야. 기구 명칭에 들어있는 ‘간(諫)’이라는 단어 속에 이 기구가 간쟁하는 기구임을 유추할 수 있다. 현재 서울의 사간동(司諫洞)도 사간원이 있던 곳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국과 고려의 경우 간쟁을 담당하는 간관들은 있었어도 독자 기구를 가지지 못했던 데 비해, 조선이 사간원이라는 독립기구를 둔 것은 조선시대 정치 제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언론 활동이 고려나 중국보다 더 활발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유교 정치이념을 만든 중국의 경우는 대간이 황제에게 눌려서 언론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관리 감찰을 주로 담당했다는 점과도 비교된다.

    왕권 견제를 위해 사간원을 둔 조선은 신권 견제를 담당할 기구로는 고려시대 어사대를 계승하여 사헌부라는 기구를 두었다. 사헌부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근처에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은 경복궁 바로 앞에 서 있는 해치상이 원래는 사헌부 앞에 세워져 있었다는 점이야.

    왜 해치상을 사헌부 앞에 세웠을까? 사헌부는 관리 감찰 및 탄핵을 담당한 기관이었음을 생각해 봐. 예부터 상상의 동물 해치는 선악을 판별하는 능력을 가진 동물로 여겼어. 즉 정의를 수호하는 동물인데, 성품이 충직하며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서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을 들으면 옳지 못한 자를 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한다. 그러니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기구인 사헌부가 이 해치를 상징물로 채용한 것은 그 기구의 성격상 잘 어울리는 셈이지. 일반 관리들이 흉배 문양으로 학(鶴:문신)과 호랑이(虎:무신)를 사용한 것과 달리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은 별도로 해치 문양의 흉배를 관복에 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진] 해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상상의 동물로 조선시대 사헌부의 상징이었다. 왼쪽은 현재 광화문 앞에 세워져 있는 해치의 모습이다. 오른쪽은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의 관복에 달았던 흉배로 학이나 호랑이와 달리 해치를 표현하였다.

    이렇게 조선은 사간원과 사헌부를 두게 되었고, 사간원 관리는 간관으로서 왕권 견제 역할을 , 사헌부 관리는 대관으로서 신권 견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고려시대처럼 왕권 견제, 신권 견제라는 각각의 고유 업무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대간’ 혹은 ‘언관’으로 불리며 빈번하게 왕권 견제와 신권 견제 기능을 함께 수행했다. 이렇게 두 관리 그룹이 수시로 세트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두 관원을 합쳐 대간, 언관이라 불렀던 것처럼, 아예 두 부서의 이름도 같이 합쳐 불렀는데, 사간원과 사헌부 모두 ‘사(司)’자로 시작하므로 ‘양사(兩司)’라고 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언론기구 양사’라고 말할 때는 사헌부과 사간원을 말하는 것이란다. 양사에 소속된 대간들의 역할이 언론 기능이었으므로 당시 그들의 역할은 매우 중시되었다. 양사의 대간은 비록 지위는 높지 않았지만 왕과 관리의 잘못을 준열히 비판했기에 높은 식견과 강직한 성품을 지녀야 했다. 일단 문과 급제자여야 했고, 집안 내력에도 흠이 없어야 했다. 또한 이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중에 판서나 정승 등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서도 대간의 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알 수 있지.

    그럼 위에서 말한 내용 즉, 고려의 대간이 조선시대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알기 쉽게 표로 정리해보자.

    그런데 여기 하나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어. 내가 조선의 언론기구를 양사라고 설명했는데, 교과서에서는 언론기구를 항상 ‘삼사(三司)’라고 설명한단 말이야. 왜 언론기구를 삼사로 가르칠까?

    이건 설명이 좀 더 필요한데, 조선은 학문을 중시한 나라였어. 그래서 홍문관(弘文館)이란 기구를 두어서 학문을 연구하고 국왕에게 학문적으로 자문하고, 왕과 신하들의 학술 세미나인 경연도 주관하고 했단다. 홍문관은 요즘 말로 하면 왕립 학술원 정도 되겠구나. 그런데 홍문관은 양사가 언론 기능을 수행하는데 때때로 힘이 부치는 일이 생기면, 본업인 학문 연구 외에 부업으로 언론 기능을 도와주었거든. 그래서 언론 기능을 수행한 기구라고 하면 좁게는 양사, 넓게는 양사에 홍문관을 포함하여 삼사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원론적으로만 따지면 언론기구는 양사라고 해야 개념상 맞는 거지. 이걸 다시 표로 간단히 정리해줄게.

    조선시대 대간의 활동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대간은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막는 역할을 수행했단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왕으로 태어났으면 자기 마음대로 했을 것 같다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그게 말처럼 될 수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해. 대간 때문이지. 그들은 항상 눈을 부릅뜨고 비판할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 임무 자체가 비판과 견제이기 때문에 그들은 때로는 자기 목숨을 걸고 직언하기를 서슴지 않았어. 고려와 조선이 각각 500년 정도의 오랜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비판과 견제 시스템이 꾸준히 작동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어.

    특히 조선은 고려보다 언론 활동이 더 활발했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 “아니 되옵니다” 즉 불가(不可)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무려 6만 5천번이나 나올 정도로 왕의 언행에 대한 견제가 만만치 않았던 나라였다. 혹여 왕이 자기 마음대로 무언가를 하려 하면 바로 “아니 되옵니다”라고 간쟁을 받았다는 거지. 양사 혹은 3사의 언론은 고관은 물론이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한 여러 규정이 관행으로 만들어져 있었어.

    왕과 대간이 대립했던 흥미진진한 몇 가지 사례를 성종 때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조선시대 대간 제도가 제도로 안착되고 활성화된 것은 성종 때였다. 이것은 소신과 신념으로 무장한 사림파들이 언론기구에 대거 등용된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성종은 이들 대간의 활발한 활동 때문에 왕 노릇하기 무척 힘들었을 거야.

    성종은 동물 사랑이 유별난 왕이었다. 그는 앵무새, 백조, 공작, 노루, 사슴, 매(해동청) 등 수많은 동물들을 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한 동물들은 주로 유구국(오키나와)이나 일본에서 보내오는 진상품에 섞여 왔는데 다른 왕들은 이러한 동물들은 쓸모가 없다고 되도록 받지 않았으나 동물을 좋아했던 성종은 이를 받아 키웠다. 특히 성종은 일본에서 전해진 원숭이를 좋아했는데, 겨울에 원숭이가 추워하자 성종은 옷을 입히고자 했다는 거야. 이 문제로 신하들이 추운 백성 한 명을 더 입히는 것이 낫다며 반대하자 신하들과 설전을 펼치기도 했지. 성종은 매사냥도 좋아했던 임금이야. 왕이 매사냥을 좋아하는 것을 두고 성종 13년부터 17년까지 무려 4년간 왕과 대간의 대립이 계속된 사실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단다. 이런 갈등 끝에 성종 17년 대간은 왕이 매사냥에 빠진 것 때문에 큰 가뭄이 들었다고 직격탄을 날렸고, 성종은 결국 이 뜻을 받아들여 매를 다 풀어주고 응방(매를 담당했던 기구)을 없앴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같은 해인 성종 17년 10월 7일에는 성종이 중국에 간 사신을 통해 낙타를 사려고 시도하다 대사헌 이경동 등 대간이 불가하다고 간쟁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대간은 중국 주나라 무왕의 고사와 고려 태조가 거란이 보내온 낙타를 굶겨 죽인 사례 등을 제시하며 왜 낙타를 사면 안되는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그중 세 번째 이유를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해마다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서 공사(公私)가 다 궁핍하여 조세로 거두어 들이는 것이 매우 적습니다. 흑마포(黑麻布) 1필의 값은 정포(正布) 10필인데, 흑마포는 저자에서 나오므로 장사하는 집에서는 실로 쉽게 장만되나, 정포는 농부의 전세(田稅)에서 나오므로 1필을 콩 10두(斗)로 칩니다. 이제 낙타의 값은 흑마포 60필인데 정포로 계산하면 6백 필이며, 콩으로 치면 6천 두이고 석(碩)으로 하면 4백입니다. 이 쓸데없는 짐승을 사려고 전세(田稅) 4백 석의 콩을 쓰니, 그 경비에 있어서 어떠하겠습니까? 그 옳지 않은 것의 세 번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검소한 덕(德)을 숭상하고 낭비를 절약하며 먼 지방의 물건을 보배롭게 여기지 마시어 끝까지 처음처럼 삼가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이런 비판에 성종도 무안했던지 애완용이 아니라 군사적 목적으로 쓸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자 했을 뿐이라는 다음의 변명으로 낙타를 살 뜻을 결국 접었단다.

    지금 올린 차자(箚子)를 보니 매우 기쁘다. 내 당초의 마음은 이 짐승을 귀하게 여긴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 출정(出征)할 때에 쓴다고 하므로, 내가 사서 한 번 시험하려고 하였을 따름이니, 물건을 애완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바른 의논을 들었으니, 즐거이 따르겠다.

    대간의 본업이 비판과 견제이니 목숨을 걸고 왕에게 간쟁했겠지만, 성종은 내가 이러려고 왕이 되었나 싶었을 것이다. 사실상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성종이 수시로 이어지는 이런 대간의 간쟁에 대해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며 불만을 토로하는 대목이 곳곳에 나온다.

    성종 9년 8월 10일 기록을 보면 도화서 화원들이 궐내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대간들이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온다. 성종의 생각은 이와 달라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고 반박했다. 이 문제로 대간과 대립하다가 성종은 이렇게 짜증을 냈다. 성종이 보기에 대간이 너무 자질구레한 일까지 간섭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대간들이 나를 손도 마음대로 놓지 못하게 할 정도로 자질구레한 일을 자주 말한다. 예전에 주(紂)임금이 상아저(象牙箸)를 만드니, 기자(箕子)가 말하기를, ‘그가 상아저를 만드니, 반드시 옥배(玉杯)를 만들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무릇 시작을 보고 그 조짐을 염려하는 것이 이와 같은 일이다. 그러나 이제 본떠서 그리는 일이 어찌 이와 같은 것인가?

    성종 25년 5월 4일에도 단단히 화가 난 성종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성종은 또 무엇이 불만이었던 것일까? 이날 대간은 윤호라는 인물을 등용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강력하게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그게 다소 미안했던지 이날 사헌부의 수장인 허참과 사간원의 수장인 윤민은 이렇게 간쟁을 시작한다. 임금이 이 간쟁을 들어주기에 얼마나 고달프며 듣기 싫어시겠냐는 말과 함께.

    신 등이 열흘마다 복합(伏閤)하여 간(諫)하고 논(論)하는 것이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사연도 궁핍해졌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들어주기에도 고달프며 듣기도 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 등이 무리하게 떠들면서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은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윤호(尹壕)의 사람됨됨이가 전하께서는 결점이 없다고 여기시지만, 그 실지는 교만하고 용렬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루하게 여깁니다. 그러니 삼공(三公)에 적합하지 않을 뿐만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깊숙한 구중(九重)에 거처하시면서 어디를 말미암아 윤호의 훌륭하지 못함을 아시겠습니까?

    성종과 대간은 이 문제로 한참 논쟁을 하게 되는데, 성종은 결국 폭발하고 만다. 도대체 왕을 뭐로 보느냐는 것이었다.

    대체로 사람을 기용하는 즈음에 대간이 번번이 그것을 논(論)하기를 ‘이 사람도 불가하고 저 사람도 불가하다.’고 하니, 그 말을 듣고 진출시킨다면 이는 권력이 대간에게 있는 것인데, 장차 임금을 어느 곳에다 두려고 하는가? 옛날 제왕(帝王)의 일을 내가 일찍이 관찰하였으니, 내가 아무리 과매(寡昧)하다 하더라도 어찌 모르고서 하였겠는가?

    이런 대간들의 끊임없는 간쟁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왕 노릇도 극한 직업 중에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성종과 대간의 대립 중 눈에 띄는 사례는 경신수야 풍습(庚申守夜; 경신일에 밤에 잠을 자지 않는 풍습)의 폐지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60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경신일이 되면, 형체 없이 사람의 몸에 기생하고 있던 삼시(三尸) 또는 삼시충(三尸蟲)이 사람이 잠든 사이에 몸 밖으로 빠져나가 상제(上帝)에게 그 동안의 죄과를 낱낱이 고해바쳐 수명을 단축시킨다고 여기는 가운데, 이를 막아 천수(天壽)를 다하려는 도교적인 장생법의 하나이다. 도교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면 2주갑(二周甲:120년)의 수명을 부여받으나, 살면서 저지르는 악행의 정도에 따라 수명이 단축되어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고 본다. 삼시는 바로 사람이 저지른 죄상을 상제에게 보고하여 300일에서 3일까지의 수명을 앗아가 버리기 때문에, 경신일 밤에는 자지 않고 삼시가 상제에게 고해바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습을 사람들은 수경신(守庚申) 또는 수삼시(守三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실록에는 경신수야의 연회 규모가 커지면서 대간들의 반대가 계속 이어졌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성종 10년부터 경신수야 기록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성종 12년과 13년까지의 기록에는 그냥 연회를 열었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종 17년부터 대간이 반대한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그들이 반대한 이유는 궁중에서 야밤중에 천기(賤妓)와 악공(樂工) 등의 남녀가 뒤섞여 풍기가 문란하고, 밤을 새우면 왕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된다는 것이며, 또한 액땜의 수단으로 행하는 수경신은 미신이며 삼시설(三尸說)은 황당무계하다는 것이다. 당시 도교는 이단 종교였다.

    성종 17년 11월에 성종은 종친들을 불러 창기와 악공들이 흥을 돋우는 큰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를 계기로 대간은 11월 16일부터 19일 사이에 경신수야 연회의 폐지를 몇 차례에 걸쳐 간쟁했다. 특히 19일에는 대사헌 이경동 등 대간들이 7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들며 경신수야 연회의 폐지를 주장한다. 대간들이 전례없이 강하게 폐지를 주장하자 성종은 그들에게 “내가 이치에 맞는 부처의 말도 믿지 않는데 하물며 삼시충이 두려워 밤을 지키겠는가? 단지 친족과 유대를 돈독히 하기 위함이다”라고 변명한다. 그렇다고 물러설 대간들이 아니었다. 재차 연회의 폐지를 주장하자 성종은 화를 내며 말한다.

    “그대들이 임금의 말을 듣지 않으니 내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

    대간들은 이에 다시 받아친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후로 정도를 지나친 일이 이처럼 심한 적이 있지 아니합니다.”

    이런 강경한 태도에 당황한 성종은 낯빛을 바꾸고 결국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경들이 나로 하여금 과실이 없게 하려고 한다니, 내 마음도 흡족하다. 장차 잔치를 파하겠다.”

    그런데 또 ‘장차’가 문제였다. 이경동은 다시 받아친다. 즉시 잔치를 파하라고 것이었다.

    “잔치를 파하겠다는 하교가 계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다만 이미 밤이 이고(二鼓)에 이르렀는데, 아직 파하지 아니했으니 신들은 실망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즉시 파하게 하소서. 신들은 잔치가 파하는 것을 보지 아니하면 감히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대간들의 주장에 성종은 결국 잔치를 당장 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잔치를 갑자기 파하게 하면서 모양이 빠지지 않도록 날씨 핑계를 댄다.

    “마침 비가 내릴 징조가 있어 파하는 것이며 경들의 말을 들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1라운드가 끝난 후 대간이 다시 경신수야 폐지를 간했다는 기록은 5년 뒤 실록에 다시 나온다. 이로 미루어 경신수야의 풍습은 성종 17년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요구에 대해 성종은 경신수야 풍습 중에는 전대부터 내려온 것도 있고, 자신의 재위 때 생긴 것들도 있는데, 잘 살펴 행하겠다고 했다. 전대부터 내려온 풍습이므로 사실상 폐지할 수 없다고 버틴 것이다.

    이렇게 성종 시기는 언론의 시대였다. 대간은 지나칠 정도로 언론의 자유를 행사했고, 왕은 늘 아니 되옵니다라는 말에 시달렸다. 그러나 성종은 짜증을 내고, 투덜거리면서도 언론의 자유를 힘으로 억압하지 않았다. 언로를 보장하고 대간의 간쟁을 잘 들어주는 것도 성군의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활발한 언론 활동이 파탄을 맞는 것은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 때였다. 일각에서는 연산군이 그렇게 변한 이유는 아버지 성종대부터 계속되던 신하들의 ‘선을 넘는’ 간언이 원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유교적 모범 군주였던 성종은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어서 그냥 넘어갔지, 아들인 연산군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언론을 통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언론을 탄압하는 길로 나아갔다.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야사인지 모르겠으나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느 날 부왕인 성종이 기르던 사슴이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의 옷을 물고 장난을 치자 참지 못한 연산군이 그 기르는 사슴을 발로 차버렸다. 그러자 화가 난 성종이 “힘없는 미물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는데 어찌 만백성을 다스리는 제왕으로 자라날 수 있겠느냐?”라고 화를 내며 꾸짖었다. 이후 왕이 된 연산은 이 일을 가슴속에 새기며 성종이 죽은 후 연산군은 그 사슴을 사슴을 활로 쏴 죽여버렸다.

    이 이야기는 연산군의 잔인한고 악마적인 기질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흔히 인용된다. 그런데 저 사슴을 당시 왕을 비판하고 견제했던 언론을 상징한다고 대입해서 봐도 그럴듯해 보인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을 귀찮게 굴렀던 사슴을 죽였듯이, 왕에게 끊임없이 대드는 언론도 그런 식으로 죽이는 길로 나갔던 것이다.

    연산군 때 있었던 두 차례 사화는 사림들이 화를 당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왕을 사사건건 견제하고자 했던 언관들을 박해한 사건이었다.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 당시 52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중 김종직과 관련된 인물이 24명이었고, 9명이 언관(전체 대비 17.3%)이었다. 김종직을 빌미로 한 언론 탄압이었던 것이다.

    무오사화 직후 연산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사화 직후 3개월 동안 6번 사냥을 나갔으며, 집권 후반기에는 수시로 사냥을 즐겼다. 이때 곡식이 자라고 있는 논밭에서도 사냥을 즐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그는 아예 궁궐에 사냥터를 설치했다. 또한 성종 때 대간들의 주장으로 폐지되었던 응방을 다시 복구했다. 응군이 한때 제일 많았을 때 1만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언론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갑자사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성종 때 사약을 받고 죽었던 자신의 어머니를 구실로 한 언론 탄압이었다. 이때 239명이 죽었는데, 그중 언론 삼사 관원들이 92명(전체 대비 38.5%)이었다.

    연산군 시기 이제 대간은 기피 관직이 되었다. 대간들의 간언은 무시되기 십상이었고, 간혹 용기를 냈다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연산군은 언론을 조롱했다. 그중 한 대목이다. 연산군이 학술 세미나인 경연은 눈병을 핑계로 빠졌는데, 연회에는 참석한 일이 있었다. 대간이 이를 따져 물었다. 연산 3년 3월 9일의 일이다.

    전번 홍문관에서 경연(經筵)에 납시기를 청할 때, 안질이 있다고 답하셨습니다. 진연(進宴)에는 안질로 사양하지 않으시고, 경연에만 납시지 않습니까? ……이것은 조종의 가법(家法)이오니 빨리 납시도록 하옵소서.

    이를 수용할 연산군이 아니었다. 연산군의 답은 간결했다.

    雖御進宴, 以眼食之乎?
    (비록 왕이 연회에 안간다고 해서 눈으로 먹는다더냐?)

    그는 이렇게 언론을 조롱했다.

    연산군은 이런 성가신 언론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직언하는 언관들 다수는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게다가 언론 삼사를 무력화시켰다. 사간원을 혁파하고, 사헌부를 축소하고, 홍문관과 경연을 폐지해 버렸다.

    연산군은 아예 말을 막아버리고자 했다. 연산군은 신언패(愼言牌)라는 나무패를 만들어 처음에는 내시들에게, 나중에는 전체 관리들에게 패용하게 했다. ‘신언(愼言)’은 말을 삼가라는 뜻이다. 신언패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한다.

    口禍之門 舌斬身刀 (구화지문 설참신도)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

    연산군은 조선시대 역사에서 중국 황제처럼 권력을 행사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견제가 사라진 자리를 연산군은 향락과 사치로 채웠다. 연산군은 전국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하여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해서 방탕한 향락에 빠졌다. 이 중에서 가장 예쁘거나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는 자들을 뽑아 ‘흥청(興淸)’이라고 이름 붙였다. 연산군은 흥청들을 모아 성균관을 놀이터로 삼고, 세조 때 만든 사찰인 원각사를 연회장, 유흥장으로 만들어 날마다 향락을 즐겼다. 이후 연산군이 흥청들과 놀아나다가 망했다고 해서 ‘흥청 망국’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말이 ‘흥청망청’의 어원이 되었다.

    연산군은 신하들을 예(禮)로써 대하지도 않았다. 연산군은 총애하는 흥청의 나들이나 자신의 가마를 메는 데 신하들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폐위 몇 달 전부터는 백관에게 충(忠) 자와 성(誠) 자를 새겨 사모(紗帽)의 앞뒤에 붙이게 하였다. 이렇게 그는 신하들을 예로서 공경하지 않고, 오로지 충성만을 강요하고 순종하기만을 원했다.

    유교 정치이념에 기반하여 세워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언론 활동은 왕권과 신권을 견제하여 궁극적으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어 유교 정치이념의 이상을 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성종 때 활성화된 언론을 단순히 통제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때려잡고자 했다. 이런 유례없는 언론 탄압은 유교 정치이념을 내세운 조선의 국가 정체성을 뒤흔든 폭거였다. 얼마 후 연산군은 반정을 통해 폐위된 최초의 국왕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성종과 아들 연산군이 갈라지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성종이 언론 기능을 수행하는 대간을 국정 파트너로 여겼다면, 연산군은 대간을 국정의 적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성종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라는 유교 정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연산군은 오로지 신권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게다가 연산군은 그렇게 강화한 왕권을 국가 발전이나 건설적 방향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이나 사치에 사용했다.

    결국 언론 탄압, 이것이 연산군이 쫓겨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는 한 나라를 이끌 국왕의 품격이나 자격이 없는 자였다.

    그리고 덧붙여

    D야.

    지금까지 고려와 조선시대 대간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이 유교적 이상정치인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어떤 식으로 구현하려고 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고려와 조선의 정치제도를 공부할 때는 어떤 기구가 뭘 했는지도 알아야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였던 대간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는 거야. 이건 마치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설명하면서 삼권분립 이야기를 빠뜨린 채, 교육부가 뭐하고, 감사원이 뭐하고, 조달청이 뭐하고를 외우는 것과 다름없는 거야.

    그것은 영혼이 없는 역사이고, 그런 역사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공허한 일이다. 옛 정치 제도사를 공부할 때는 무엇보다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꿈꾸고 지향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 역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많을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될거야.

    마지막으로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해야겠다.

    출범한 지 1년이 지난 윤석열 정부는 특정 검사 라인이 국가 주요 기구의 최고위직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매우 희귀한 체제의 정부라고 볼 수 있다. 공직자 인사 추천과 검증도 법무부 내 인사정보관리단이라는 검찰 라인에서 하고 있지. 어떤 정치학자는 이와 같은 현 정치체제를 ‘검찰 통치 체제’로 규정하면서, 영어로 ‘Prosecracy(프로시크라시)’라고 이름 붙였단다. 검찰을 뜻하는 ‘Prosecute’와 ‘Democracy’의 끝에 붙은 ‘cracy’를 합성하여 만든 신조어지.

    행정부에 속한 법무부 산하의 한 기관인 검찰청 출신들이 권력을 독점한 것 자체도 문제지만, 이 정부가 지난 1년 동안 보여준 민주주의 퇴행은 매우 우려할 만하다. 합의와 타협을 중시하는 정치의 기본 원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수사, 압수수색 등이 자리를 차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더욱 큰 문제는 민주주의 정치의 근간인 삼권분립이 너무도 쉽게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일본과의 정상회담에서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해법으로 내놓은 ‘제3자 변제’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행정부가 뒤집어 내놓았다는 점에서 삼권분립을 심각하게 위반한 거야. 게다가 검찰이 가진 수사권을 축소하는 취지로 국회가 제정한 ‘검찰 수사권 축소 법안’을 법무부 시행령을 통해 뒤집어 버린 것도, 대통령이 향후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공천을 유리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권 여당 당 대표 선거에 개입한 것도 삼권분립 정신에서 벗어나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삼권분립 체제를 위반하는 것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민주주의 퇴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심지어 언론을 길들이고, 장악하고 탄압하는 길로 치닫고 있다. 이렇게 현재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언론이야말로 사회의 중심을 잡는 기능을 수행한다. 지금은 언론이라고 하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사용한 언론의 의미와는 다소 다르게 신문이나 방송 등 매스미디어를 의미하는 말로 쓰고 있다. 작동 방식은 비록 다를지라도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 감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기능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자들은 흔히 언론의 정권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려하기보다, 언론을 자기 입맛에 길들이려고 하거나 그게 뜻대로 안되면 탄압하려고 한다. 그건 어쩌면 모든 권력의 속성일 수 있어.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언론은 많은 자유를 누려왔다. 그러나 정권의 언론 장악과 탄압이 특히 심했던 것은 이명박 정부 때였는데, 현재 윤석열 정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다수가 이명박 정부 출신이기 때문일까 이 정부하에서 다시 언론 장악이 노골화되고 있다. 미국 방문 때 있었던 ‘바이든-날리면 사건’을 계기로 MBC를 겨냥해 가짜뉴스를 유포했다고 규정한 것으로 모자라, 대통령 전용기에 MBC 기자들 탑승을 불허한 것은 그 서막에 불과했다.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긴 후 지속적인 구설수를 스스로 만들더니 결국 도어스테핑도 접어 버렸다. 기자 회견이란 것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그런 대통령이 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정가에서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가 있다. 방통위는 KBS·EBS와 MBC 대주주인 방문진 이사를 추천·임명하는 권한과 함께 방송사업자 인허가 권한도 가지고 있다. 이곳을 장악해야 공영방송을 장악할 수 있다. 최근 한상혁 방송위원장이 면직된 일도 그렇고, 야당에서 방통위 상임위원으로 추천한 최민희 전 의원 임명을 대통령이 두 달째 거부하고 있는 것도 모두 방통위의 수적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정권의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이 방통위를 장악하는 것은 내년 있을 총선 전까지 공영방송 경영진을 여권 성향 인물들로 바꾸기 위한 사전 포석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여권은 정연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 김의철 KBS 사장 등의 사퇴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KBS는 수신료 분리징수 문제로도 압력을 받고 있다. 집권 여당은 최근 KBS·MBC 라디오 패널 구성이 편향적이라며 방심위 심의를 신청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경찰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개인정보가 담긴 문건 유출 과정에 MBC 기자가 관여한 것으로 의심하고 해당 기자와 MBC, 국회사무처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다. 이명박 정부 시즌2로 불리는 윤석열 정부는 언론 자유 침해 논란을 빚었던 이명박 정부의 언론 정책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 이 와중에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하는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서 한국은 1년 사이 43위에서 47위로 4계단 떨어졌다. 앞으로 이 자유지수는 더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언론을 탄압했던 연산군은 결국 폐위되었다.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 자유를 침해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결국 감옥에 갇혔다.

    윤대통령은 어느 길을 걸을 것인가?

    연산군의 길인가? 이명박의 길인가?

    D야.

    바라보는 현실이 비록 답답해도 기우뚱거리며 세상은 다시 균형을 잡을 거야. 민주주의를 몸소 경험했던 한국의 깨어있는 시민들의 저력을 믿어보자꾸나.

    너의 건강과 행운을 빌며 긴 글을 마친다.

    [참고한 자료]

    송기호, 『임금되고 신하되고』,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박재우, 『고려전기 대간제도 연구』, 새문사, 2014

    이성무, 『조선은 어떻게 부정부패를 막았을까』, 2009

    KBS [역사저널] 162회 조선의 언론 1편, 2018.3.4 방송

    KBS [역사저널] 163회 조선의 언론 2편, 2018.3.11. 방송

    경향신문 2023.5.30. 정대연 ‘내년 총선 전 방송장악 시나리오 본격 가동…MB정부 전철 밟나’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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