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후마니타스’가 꽤 오래전에 펴낸 책,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한 마디로 ‘ㅎㄷㄷ’한 책이다. 두껍고 전문적이며 어렵다. 최장집 교수님이 이 책을 “대학원 수업을 통해 자세히 검토했다” 했으니, 오죽하랴.

뇌의 용량은 안되고, 욕심은 나고, 때문에 무려 3달 가까이 이 책을 읽었음에도 사실 이 책의 약 2% 정도 밖에 건지지 못했다. 그 2%는 ‘읽는 것’이 아니라 ‘훑던 중’ 몇몇 인상 깊었던 구절에 밑줄을 좀 쳐 놓았던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사법부의 뒷담화를 하려 한다.

아마 이 어려운 책 와중에 그나마 인상 깊었던 구절들이 남아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과 ‘사법부’가 실제로 ‘민주주의’에 근간하는 것인지 헛갈리는 지금의 시대상 때문일 것이다. 지금 ‘법’은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우리는 법에 접근하는 모든 경로를 막혀버렸다. 이 와중에 이 책이 나온 것은 그야말로 시기적절하다. 물론 어렵지만 않았다면.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법치’를 내세웠다. 문제는 그 법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누구에 의해 지배당하는가라는 문제다. 현 정부가 자주 쓰는 단어인 ‘떼법’이란 말도 그렇다. 떼가 원하면 법이 되거나, 최소한 논의라도 되어야 한다. 그런데 떼법은 늘 척결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떼’는 고상한 분들, 예컨대 삼성처럼 돈이 많다거나, 어떤 법의 망도 피해갈 수 있는 권력이 있다거나, 그런 분들을 제외한다. 여기서 떼는, 비정규직, 장애인, 소수자, 빈민, 철거민들이다. 이들 중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은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법치의 안전함 속에 들어온다. 이처럼 법은 권력자들에게 유용한 자산이다.

이는 최장집 교수님의 지적대로 “법과 관련된 모든 제도와 실천이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나름 이쁘게 만들어졌다지만, 이 헌법에 기초한 진정한 ‘법치’가 안되는 이유는 이미 헌법을 파괴하면서 법을 엉뚱하게 적용했다는 군사독재시절을 거쳤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건설업으로 큰돈을 벌었던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이나, 5~6공 시절 헌법의 파괴를 통해 부와 권력을 맛봤던, 혹은 시장권력에 붙어 단맛을 보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한나라당이 보는 ‘법치’가 지금의 이와 같은 상황을 만들었던 것은 단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어쨌건 우리는 ‘선거’라는 대의 민주주의를 통해서 ‘법치’를 실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과정이 어찌되었던 우리는 프레임 구도에서 한나라당 속으로 들어갔고, 결국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헌법에 명기된 표현의 자유도, 인간의 존엄성도 그들의 법치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지고 있다.

이는 지난 10년간 정치적 권위주의를 일정정도 청산했으나 경제적 권위주의에 권력을 빼앗긴데 기인한다. IMF라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지만, 지난 10년간의 ‘법’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고, 이 시장이 이명박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어쨌건 항상 고민이 된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법치는 올까?, 아니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동시에 발전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에게 보다 낳은 판단은 무엇이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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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법의 지배와 계보(스티븐 홈스)

p.75 정부는 항상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집단들, 즉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협력이 필요한 집단들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대지주의 권리는 고아의 권리보다 훨씬 오래전에 보장되었다.

p.88 운 좋은 소수는 돈으로 최고의 의사를 살 수 있겠지만, 가난한 이웃들 속에 잠복해 있는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만 예방접종을 받아서는 아무 소용없는 전염병이 발생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 공중 보건 계획에 돈을 기꺼이 내놓을 것이다.…그런 재분배들은 자선이 아니라 신중한 계산의 산물이다.

p.128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자기들 덕분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곤경에 처하게 된다.…문제는 기억상실증이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대의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자원들이 약하고 가난한 자들이 제공한 것이며, 자신들이 그들의 협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많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은 자국의 경계선이 일반 시민들의 금전적․인적 기여에 의해 보호되지 않으면 자신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때때로 망각하는 것 같다.…결국 이런 무도한 행위들은 최소한 사보타주라든가 때로는 반란 같은 형태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2. 권력, 규칙, 그리고 준법(이그나시오 산체스-쿠엔카)

p.153 부정행위가 규칙에 대한 실제적인 위반은 아니다. 부정행위를 한 사람은 규칙을 따르지 않은 셈이지만, 규칙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규칙 위반은 눈에 보이는 행위인 반면, 부정행위는 언제나 몰래 이뤄진다.

4. “민주주의의 정치적 토대와 법의 지배”에 대한 발문(배리 웨인개스트)

p.208 “국가의 행위를 규제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책임 의식이 상당히 신뢰할 만한 수준일 경우에만 … 여당, 대통령 혹은 주권자는 게임의 규칙들을 지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실현시켜 나간다. 바로 이것이 헌법적 규칙들을 자기 강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시민들은 법의 지배의 주요 제도들을 수호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5. 정당은 왜 선거 결과에 복종하는가?(아담 쉐보르스키)

p.215 민주주의의 생존 확률은 1인당 국민소득이 증가할수록 높아진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미만인 나라의 경우에 특정 해에 민주주의가 붕괴될 확률은 0.1636인데, 이는 이들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기대 수명이 대략 6년 정도임을 의미한다. 1,001~3,000달러인 나라들의 경우에는 그 확률이 0.0561, 3,001~6,055달러인 나라의 경우에는 확률이 0.0216으로, 6,055달러를 넘는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근데 우린 왜이럴까?)

9. 수평적 책임성의 도구로서 법원

p.372 일반적으로 별 주목을 못하고 있지만, 사실상 조직 내에서 나타나는 위계질서의 역할이야말로 판사집단 내에서의 실제적인 역학이라던가 법원의 정치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밝히는데 결정적이다. …사법조직은 전통적으로 피라미드 형태의 조직 구조 내에서 작동한다.…개인적 영향력은 개인이 위계질서를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달려 있으며 오직 승진을 통해서만 증가될 수 있다.…이때 성과에 대한 판정은 평가 대상이 되는 판사가 수행한 업무에 대한 상급자들의 평가를 통해 이뤄진다.(신영철 사건의 전모다)

p.374 이탈리아 사법 제도는 커다란 변화를 겪어 왔다. 그 결과 최고사법평의회는 판사와 검사의 지위와 관련된 모든 결정을 내리는 일을 맡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채용, 임명, 승진, 전보, 그리고 징계 절차가 법무부 장관의 손을 떠나 평의회에 집중되었다.…평의회 구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탈리아에서 사법부의 ‘자치’가 어느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좀 더 잘 살펴볼 수 있다.…사실상 사법부 밖의 구성원들은 야당을 포함해 의회가 대표하는 여러 정치 세력들의 힘을 반영할 수 있도록 선정된다.(그럼 합리적 대안은?)

11. 정치적 무기로서의 법의 지배(호세 마리아 마라발)

p.439 다수의 변덕을 제어할 수 있는 그 어떤 합법적 경계가 없을 때, 이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관련해 염려하는 가장 끔찍한 악몽이다. 이는 또한 ‘위임 민주주의’의 주요 특징이기도 하다. 즉 정부에 ‘다른 제도들, 예를 들어 법원과 입법부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그런 제도들에 대한 책임성은 단지 성가신 장애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그런 혐의를 받는 이는 국민투표제적․표퓰리즘적 정치인으로, 이와 관련된 예는 무수히 많다.(우리는 악몽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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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버스> 당신의 관계는 안녕하십니까?

가보지는 않았지만 뉴욕, 매력적인 도시다. <섹스 앤 시티>의 도회적인 젊고 부유한 셀러리맨들의 도시, 패스트푸드와 만원 지하철까지 낭만적일 것 같은 도시, 묘한 매력이 있는 도시다. 반면 9.11의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도회적이고 젊지만, 슬럼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뉴욕은 그 자체로 현대를 상징한다.

모던하지만 전근대적인 이 도시에서 성을 매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 <숏버스>다. 다만 ‘숏버스’가 미국에서 “일반적인 버스를 타고 등교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통칭하는, 어딘가 모자라고 남들과 다른 이들을 놀리는 은어”인 것처럼 어딘가 다른 듯한 사람들을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은 게이커플과 그들을 지켜보는 또 다른 게이들,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섹스 테라피스트, SM 전문가(??) 등 주변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캐릭터 들이다. 물론 주변에 흔히 보기 어렵다는 주관적 판단은 이들이 수가 적어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인지, 사회가 애써 숨겨 놓는 것인지 가정을 모두 포함한 판단이다.

어쨌건 이들은 게이와 ‘자극적인 무엇인가’를 느끼지 못하는 집단으로 나뉘어 스토리를 진행시킨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일상적인 성적 행위와 이를 포함해 진행되는 인간관계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고 ‘무엇인가 다른’ 것을 찾아 나선다.

때문에 게이커플이나 성교를 한 적이 없는 제이미-제임스 게이커플은 섹스 테라피스트인 소피아를 찾고,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성교를 하고 타 연인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자신은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소피아는 자신보다 금기를 다소 넘어선 이들에게서 이른바 일탈의 장소인 살롱 ‘숏버스’를 소개받는다.

그리고 이들은 난교와 동성애가 ‘횡횡’하는 이 장소에서 성적 관계의 자극을 얻는다. 이들은 섹스를 통해 그동안 성적관계를 통해 받았던 상처를 치료하고 자신이 갇혀있던 어떠한 금기를 넘어섬으로서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이를 통해 새로운 관계의 활로를 모색한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결국 ‘성’이 노골적으로 들어있어 우리가 좀 불편 할 뿐 관계에 대한 같은 고민을 지니고 살아가는 그들이 이야기인 셈이다. 외로움, 실망, 사랑 그리고 고통, 누구나 하고 있는 고민들을 이들 역시 하고 있고 여기서 벗어나려 한다.

같은 학교를 가지만 스쿨버스와 숏버스를 타고 가는 차이, 단지 그 차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의 범죄행위도 아니고 난잡하고 더러운 것도 아니다.

재미있는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엄청난 작품성이 있는 영화는 아니다. 논란이 많아서 그렇게 비치는 것이 좀 안타까울 뿐, 딱히 좋은 점수를 줄 만한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 이 영화를 본 결론이다. 다만 영화 속 음악은 무척이나 좋았다. 단지 ‘섹스’가 거북하지 않은, 그냥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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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 한국-일본의 우파동맹?

이상하다. 10년이 훌쩍 넘은 KAL858 폭발범 김현희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발원지는 <조갑제닷컴>이다. <조갑제닷컴>은 김현희를 집요하게 들고 나왔고 이를 <월간조선>이 받았다. 그리고 어제, 김현희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그의 이름이 보수진영 전체로 번졌다.

보수진영이, 이토록 집요하게 김현희를 들고 나온다면 분명한 목표가 있을 것이다. 사실 그 목표는 오래전부터 계속 공공연히 거론해왔다. 컴펙트하게는 노무현 정부, 넓게는 그들이 칭하는 대로 ‘좌파정권 10년’일 것이다.

이미 KAL기 폭발범, 테러리스트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지시가 북한으로부터 비롯되었음도 누구나 알고 있다. 당시 북한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을 꾸몄고, 김현희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피해자로 등장한 것이다.

보수진영은 “지난 좌파정권의 국정원이 끊임없이 그 사건을 조작하려 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좌파정권이 KAL기 폭파를 북한이 아닌 전두환 정권이 조작한 것이라 증언하라고 그녀를 자꾸 채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인 2006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 위원회에서는 전두환 자작극에 대해 사실무근 판결을 내렸다. 이미 김현희의 말 그대로 정리가 끝난 사안이란 것이다. 다만 노태우 정권이 그 사건을 정치에 활용했다는 판결정도가 내려졌다. 그런데도 계속 ‘좌파정권 10년(사실 좌파정권도 아니거늘)’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만약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이 그럼에도 김현희에게 “전두환 정권의 조작”이란 증언을 하라고 시켰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의문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왜 노무현 정권은 공식발표는 전두환 정권의 손을 들어주면서 뒤에선 조작을 하려 했는가? 무엇 때문에? 무엇이 도움이 되어서?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어제 기자회견이 특이했던 것은 일본의 뜨거운 관심이다. 물론 일본의 관심은 노무현 국정원의 조작은 아니다. 지난 몇십년 꾸준히 제기해왔던 일본인 납치문제에 관한 것들이다. 일본인 납치문제는 사실로 드러났고 북한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히 해명하지 않는다. 가족들까지 만나지도 못하는 반인권적 행태를 자행하고 있다.

문제는 이날 일본의 관심도 ‘아소다로 살리기’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살아있을지도 모르겠고...” 정도의 증언으로 북한을 압박한다는 의중인데 이는 조만간 치러질 총선을 돌파해야 하는 아소다로 내각의 상황에서 인권과 드라마를 바탕으로 한 ‘북한’이란 공공의 적을 만듦으로서 낮은 지지율을 돌파하지 않겠느냐란 추측이다.

한국과 일본, 똑같이 수구 기득권 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낮은 지지율에서 허덕거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김현희’라는 테러리스트를 “가엾은 여인”으로 극화시켜(어떻게 보면 불쌍하긴 하다) 한국은 보수드라이브를 걸고 있고 일본은 대북 적개심으로 내부단결을 도모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수구 동맹’인 셈이다.

실제로 외교통상부는 이번 면담이 일본 정부의 주관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도 납치자 문제는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을 한다는 정부 입장에 따라 이번 면담을 주선했다고 말해 한국 정부의 협력이 있었음을 인정했다.(프레시안)

일본도 화답했다. 일본 정부는 대한항공기 폭파범인 김현희(47)씨와 일본인 납북피해자 가족간의 면담 실현을 "한일 양국간 미래지향의 성과"로 높게 평가하면서 이를 통해 북한에 대해 납치문제의 조기 재조사를 촉구해나갈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연합뉴스)

그런데 그나마 일본의 납치범 문제는 봐줄 만이라도 하다. 그런데 한국 보수세력들이 뜬금없이 노무현 정부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양극화 심화와 부동산 인플레와 같이 하고많은 노무현 정부를 물고 늘어질 만한 주제 중에 왜 납득도 안되고 재미도 없는, 왠 반공쓰나미인가?

누구인가? 그녀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한국과 일본의 좌파들인가? 아니면 양 국에서 기득권을 잡고 있는 우파들인가?

ps. 북한 사람들에겐 별 감정 없지만 개인적으로 북한 정권은 혐오하는 편이다. 오해 없으시길,

ps2. 위 사진은 김현희 기자회견 사진, 출처는 <헤럴드경제>입니다.

ps3. 오른쪽 사진은 김현희씨와 조갑제씨가 같이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출처는 <조갑제닷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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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20세기 소년>과 ‘2009년 대한민국’

1.

1997년부터 무려 10여년 동안 연재된 <20세기 소년>, ‘만화책 기다리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연재가 끝나고서도 꽤 지난 후에야 이 만화책을 접하게 된 나는, 20권이 넘는 만화책을 순식간에 독파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탄탄한 구성, 곳곳에서 이어지는 반전까지, 숨 막힐..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쨌건 모처럼 만난 웰메이드 만화임은 틀림없었다.

플롯은 단순하다. 종말론에 기초를 두고 영웅담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보통 공상만화와 큰 차이점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이 특별히 매력적인 것은 막무가내 종말론이 아닌, 비록 공상에서 출발했지만 예견된 ‘시나리오’가 있는 종말론이란 것과, 영웅담에 등장하는 영웅이 근육빵빵 멋쟁이가 아닌, 덥수룩한 수염에 기타를 둘러맨 나이 좀 먹은 아저씨란 점이다.

                     △절대 '악', 친구(영화 '20세기 소년' 중)

2.

본론으로 넘어가, 개인적으로 <20세기 소년>을 읽으며, 2009년 대한민국 현실이 떠올랐다. 사실 이미 광우병 촛불정국 때 이 만화를 기초로 정부를 비판하는 패러디물이 나오기도 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현실과 이 만화를 비교하기도 했다. 절대악인 ‘친구’가 “이명박 정부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그런데 <20세기 소년>이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에 공감하나 사실 이명박 정부가 ‘친구’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한나라당이 ‘친구’의 거수기, ‘우민당’같다는 느낌은 다른 해석들과 같으나 같으나 개인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친구’가 아닌 ‘만죠메 인슈’와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만화와 영화에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친구’에 열광하고, 이 ‘친구’를 등에 업은 만죠메 인슈와 우민당을 지지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람들이 이와 같이 맹목적으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열광했나? 그렇지는 않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전체 득표나 지지율은 20~40% 전후에 불과하다.

3.

그럼 ‘친구’는 무엇인가? 바로 ‘자본’, 즉 돈이다. 2009년, 대한민국 사람들은 돈에 열광한다.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고 그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슬프지만 ‘친구’를 보며 떠올린 것이 바로 ‘자본’이었다. 친구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자신이 극복하며 영웅이 되었다. 지금 2009년 대한민국도 그렇다. 문제점은 ‘부의 불균형’에 있는데, 성장으로 이를 극복하려 한다. 그리고 뉴타운, 대운하란 욕망의 이름으로 자본은 다시 영웅이 된다.

만죠메 인슈가 친구를 발견하고 그를 바탕으로 우민당 수괴에 올라 형식적인 총리가 되었듯, 이명박 정부도 ‘성공’이란 그럴싸한 이름으로 '부자당' 한나라당을 통해 대통령이 된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기 보다. 그가 가진 성공의 코드가 좋았고 '747'은 'BBK'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되었나? 사람들은 친구에 열광했지만 친구는 인간을 전멸시키려 했다. 이명박 정부는 747을 내세웠지만 이는 허구라는 것이 이미 드러났다. 거기에 뉴타운은 사기혐의로 재판장으로 갔다.

4.

그럼 의문점이 있다. ‘켄지’는 누구인가? 만화에서 영웅인 켄지는 사실 친구를 만든 결정적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탐욕이 자본을 만들었지만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결국 탐욕에서 벗어난 켄지는 ‘친구’를 극복하고 영웅담의 마지막 퍼즐조각을 완성한다. 그러나 과거를 알게된 그는 마지막 영웅을 갈구하는 대중의 부름에 떳떳하지 못했다.

어쨌든 결국 이 싸움을 끝내는 것은 슈퍼맨 ‘오쵸’, 레지스탕스 ‘요시츠네’, ‘친구’의 적자 ‘칸나’ 등 모두의 힘이 더해진 것이였지만 기타리스트 ‘켄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과거 자신의 꿈을 향해 기타를 쳐왔던 낭만주의자가 결국 그 싸움을 끝내버린 것이다.

여기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자본’, 아니 최소한 ‘자본’을 바탕으로 강압과 철권을 휘두르는 정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낭만이 필요하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열정이 자본에 지배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길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순전히 내 해석이다.)

5.

이런저런 생각을 다 빼더라도, <20세기 소년>은 한편의 대작 만화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화를 보고 휴우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영화까지 찾아본 나는 영화 2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낭만의 기타를 든 20세기 소년이 나타나기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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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ZZiRACi 2009/03/11 1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만... '나옥희'님께서 그렇게까지 생각하시진 않았을 듯.

    여튼 재미있는 만화입니다.

    • dalgona82 2009/03/12 1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옥희가 누구인지 오래 고민했습니다. ㅋㅋㅋㅋㅋ 그냥 문득 그런생각이 들어서 끄적거려 봤어요 ^^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