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생태보고서(Ⅲ)

결론 - 20대가 20대에게. part#1

1.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른들이 말해왔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안타깝게도 어린 나는 직감했다. ‘훌륭한 사람’과 ‘돈 잘 버는 사람’의 등식은 성립되는 것이라고. 돈이 있어야 ‘성공’을 붙일 수 있는 것이고, 돈이 있어야 남을 도울 수 있는거다. 때문에 훌륭한 사람은 돈이 많아야 하는 것이고,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전두환 정권 이후, 아직 군사독재에서 벗어난 시국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바로 우리 윗세대들과는 조금 다른, 그리고 그보다 더 윗세대들과는 꽤나 다른 현실에서 살아왔다. 우리가 사춘기 때에는 대한민국에 마지막 호황기가 찾아왔을 때였고, 어떤 소비도 큰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소비에 길들여져 갔다.

그러나 우리가 대학에 들어갈 시점에서, 대한민국은 장기침체를 맞았다. 여기에 부모님과 삼촌, 형 누나들이 뽑아놓은 대통령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경쟁’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우리의 대학도 경쟁이 시작되었다. ‘질’의 경쟁이 아닌, ‘돈’의 경쟁, 1학년 때 입학금 포함, 210만원, 2학년 입학금 제외하고 210만원, 복학하고 3학년 270만원, 4학년은 300만원 선에 도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몸으로 체득한, 우리의 소비는 멈추지 않았다. 해마다 새로운 것들이 나왔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도태된다는 강력한 경고가 나왔다. 우리는 TV를 보며, 인터넷을 보며 흉내내고 따라했으며, 내 주변 친구들과 함께 소비하고 향락했다. 반면 대학에서 졸업한 우리는 비정규직, 외주 노동자로 밀렸고, 우리의 이마에 ‘88만원 세대’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에 처했지만 현실에 순응만 하며, 투표조차 안하는 ‘한심한 세대’, 10대들이 청계천에서,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 동안, 도서관에 틀어박혀 토익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딱한 세대’가 되어버렸다. 30살이 다 되어서도 부모 곁에서 떠나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고, 결혼해도 아이조차 제대로 낳지 않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그게 우리 20대다.

그러니, “20대들이여! 일어나라”는 말이 나온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인지 모르겠다. 일본처럼 대한민국에도 ‘청년유니온’이란 세대별 조직이 나타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인지 모르겠다. 오늘도 여기저기서 20대들의 실상을 알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도 당연한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일어나라고 아무리 흔들고 깨워도 20대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정규직 비율이 10%가량 더 늘어나면, 그제서야 일어날까?, 공무원 선발기준을 강화하고 선발인원을 축소시키면 일어날까? 아니, 그럴 가능성은 없다. 청년유니온에 청년들이 가입할 가능성은? 민주노총이 주최하는 청년캠프에 청년 비정규직들의 관심이 쏟아질 가능성은? 진보정치가 주최하는 20대 대상 강연회에 운동권이 아닌 학생들이 찾아올 가능성은? 이 가능성이 모두 10%를 넘을 가능성은? 없다. 단언한다.

그들은 ‘저항’보다는 ‘도태’를 택할 것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자본주의 사회에 맞춤형으로 길러졌기 때문이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말하는 ‘동물의 왕국’은 안타깝게도, 이들이 사는 ‘인간의 왕국’ 그대로다. 이들은 자책은 해도, 원망은 하지 않는다. 때문에 절망은 해도 변화를 위한 행동에는 나서지 않는다.

2.

기성세대가 20대들을 이끌어내기가 이렇게 어렵다. 그럼 20대 스스로가 20대를 위해 나설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적으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압박하며 다그친다. 함께 사는 법보다 혼자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 익히면서, “사자는 자기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트린다”는 자본주의적 명제를 받아들이고 도태를 자연스럽게 여긴다. 그것은 동물의 왕국이지, 인간의 왕국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 안에 가둬놓는 비극적인 풍경인 것이다.

우리는 더 큰 적을,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피폐시키는 적을 앞에두고 우리 끼리 갈라져 싸운다. 20대 정규직은 20대 비정규직을 무시하고, 20대 비정규직은 20대 백수, 공시족들을 무시한다. 20대 백수, 공시족들은 같은 처지의 그들을 무시하고 비난한다. 학교다닐 때 친구였던 이들이다. 한 운동장에서 뛰고 축구하고 수다떨던 그들이다. 맨 앞 글에서 말했다. 한 선생님이 그랬다고 “너희 졸업하면 그 관계 유지될 것 같냐?”는.

경쟁에 밀려난 사람들을 향해 혀만 끌끌 차는 것으로는 우리 20대들은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해 토익책을 파고들면, 독서실 앞에 앉으면, 그래 나는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친구들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삶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내 아이에게 엄마 아빠의 따뜻하고 정감 있는 대화보다 영어테이프를 들려줘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앉아있어도 내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앞으로 비정규직의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고, 정규직의 문은 좁아질 것이다. 스펙은 높아질수록 더욱 올라갈 것이고, 그렇게 들어간 회사에서 우리는 관계법령도 모른 체, 자연스럽게 노동을 착취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다 그런거야, 이런거 못견디는 사람이 어디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당신이 어느날, 계약해지를 당할 수 있다. 정리해고를 당할 수 있다. 갈 곳 없는 찬바람에 몸을 뉘여야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당신을 보듬어주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올 수 있다. 동화책에 자주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

3.

설령 그들이 모두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극복하고, 스스로 경쟁을 거부하고 연대에 나선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세상은 변할 것인가? 혁명을 위한 모든 조직이 ‘혁명의 성공’을 명분으로 ‘효율성’을 찾아 ‘군대식 문화’를 찾아왔다. 인민들의 평등한 삶, 자본주의적 삶을 배척위해 건설되었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진보적인가?

진보진영 내에 존재하고 있는 상명하복의 문화, 토론 없는 일방주의, 파시스트적 성격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한 해소 없이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겠는가? 민주노총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분명하고도 단호한 징계 없이 남성-여성 노동자들의 연대를 이끌어 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조직의 보위를 위한 것인가? 조직을 망치기 위한 것인가?

본의는 아니겠지만, 사회적 시선을 의식해 ‘서울대’라는 이름 하나 앞에 떡 붙여놓고 책을 내며 “학벌철폐”를 주장하는 진보, ‘사랑’과 ‘호감’이란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성폭력, 성추행을 저질러 놓고도 “내 마음은 순수했다”고 드라마 찍는 진보, 이런 진보와 연대가 가능한가? 물론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부를 바탕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도 오바다.

그렇지만, 지금의 진보운동에 권위적이고 정파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일반적이다. 물론 그들의 민주화-노동운동의 경력은 존경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그 기억에 휘둘려 “니들이 뭘 알아?”,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는 알아?”,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앉아있냐?”라고 묻는 분위기에, 그 딱딱함에, 20대들은 지쳐 튕겨 나오지 않을까?

4.

20대 사이에서는 어떤가? 29살은 25살에게 떳떳한가? 25살은 21살에게 떳떳한가? 우리는 어른들에게 봐왔던 파시즘을 자연스럽게 내 안에 넣고 있지 않은가? 일병이 이등병을 갈구고, 상병이 일병을 갈구고, 병장이 상병을 갈궈도 군대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적은 ‘간부’란 농담이 있듯.

그런데 우리 스스로 ‘꼰대’라 무시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닮아간다. 20대 조직문화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내 대학 다닐 때, 했던 사발식, 그리고 줄빳다 현장, 당시 ‘왕고’라는 사람도 지금의 나보다 나이가 많지 않았다. 이런 조직문화는 왜 20대 사이에 남아있고 존재해야 하는가?

문화적으로 세상을 뒤바꾸려면 20대가 가장 큰 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렇지 못하다. 20대 여성은 20대 남성에게 “돈 많이 벌어오라”로 닥달하고, 20대 남성은 20대 여성을 향해 ‘된장녀’라며 화살을 날린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비정규직이여도 20대 남성과 여성의 연대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조직 내 말단직원으로 같은 설움을 받고 있어도 연대는 없다.

20대 남성에 의한 ‘보건휴가제 전면도입’ 투쟁, 20대 여성에 의한 ‘군인 월급 현실화’ 투쟁은 보기 힘든 것일까? 대학을 경험한 20대 후반이 20대 대학생들을 위한 등록금 투쟁에 어깨를 걸고, 20대 대학생들이 20대 후반이 겪고 있는 현실이자, 앞으로의 미래가 될 수도 있는 비정규직 철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한가?

왜 우리는 관전 중인 문제들을 두고, 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일까? 20대 남성과 20대 여성이 어깨걸고 부모세대를 향해 “사랑하니 결혼하게 해달라”고 절규하고, 더 나아가 국가를 향해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그 날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다.

Posted by dalgona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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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림동 박 2010/03/29 17: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읽으면서 눈물이 나잖아요. ㅠㅠ 이번 결론 part1은

    개인적으로 매우 훌륭한 글이라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판례를 많이 보다 보니 이런 문장이 더 익숙해 졌습니다.ㅡㅡ;)

    개인적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저의 지상 최고의 바램으로서 30대 남성이 20대 초반 여성과

    국가를 향해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그 날이 오기를 누구보다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ㅡ.,ㅡ

    • ..!.. 2010/03/31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판례를 많이 보니 머리가 많이 빠지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2. 연예인 2010/04/01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완전ㅇ부모시발놈은인생의걸림돌엄마가대신디져

  3. 부리 2010/05/22 2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회에 입성한지 1달째, 도무지 이 이상한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든,
    그렇다고 소리를 내지도 못하는 저의 마음을 대변해주고계시네요...

  4. 동명대 2010/05/28 1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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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의 슬프고도 희망찬 ‘혁명론’

주인공이 죽었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온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우짜나. 이건 그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다. 그러나 추노의 마지막을 보며 비통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추노를 보며 담담히 희망을 얘기한다. 왜 그럴까?

세 가지, 다른 혁명론. 그러나...

극은 병자호란이라는 국란을 치른 후의 조선, 광해군을 폐하고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인조시대의 이야기다. 청나라의 침략과 이로 인한 내부 동요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조선은 노비의 수가 급증하고 이로 인해 더욱 사회적 안정감이 떨어져버린 상황, 드라마는 이런 혼란의 시대, 두 가지 혁명론을 -엘리트혁명과 민중혁명- 그려낸다.

조건은 완숙단계다. 왕의 위엄은 외세에 의해 땅에 떨어졌고 좌의정을 중심으로 한 양반사회는 사적이익을 탐하기 위해 민중을 들쑤셔 놓는다. 어느 하나 혁명의 도화선이 아닌 것이 없고, 어디서부터 혁명이 시작 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단계,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한 마디로 실패한 혁명을 얘기하고 있다. 문제는 “왜 실패했는가”가 될 것이고, 극은 그 이유를 두 가지 혁명의 전개를 통해 찾는다. 극에서 송태하 사단은 엘리트 중심의 왕의 교체를 통한 상층부 개혁을, 업복이 등 노비들은 직접적인 민중혁명을 기도하고 있다. 모두 세상을 뒤집고, 잘 먹고 잘사는 사회를 꿈꾸었지만, 공통적으로 극복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극을 지배한다.

                  △ 그들의 사랑에도 '노비' 글자가 선명하다. 그 땐 그랬다.

바로 ‘신분제’다. 몇 천년을 이어온 신분제에 대해 이들을 쉽게 부정하지 못한다. 송태하는 자신의 아내인 언년이에게 “어떤 세상을 꿈 꾸는가”라고 묻고, 언년이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말한다. 이론적으로 이를 받아들인 송태하는 그러나 자신의 아내가 정작 노비출신임을 알자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신분제가 가지는 힘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노비출신 아내에게 고백한다. “단 한 번도 양반 노비가 평등한 사회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시간을 달라”고.

업복이네 역시 양반사회가 뒤집어지는 사회를 바라지만, 대안사회를 그리지 못해 심한 혼란감을 느낀다. “노비가 양반을 부리면, 그게 뭐가 다른 사회냐”는 업복이의 물음은 그래서 매우 진보적이다. “임금은 똥 누나?”, “에이, 임금이 똥 누겠나?”, “그렇지? 누가 대신 눠 주겠지?”라는 재미있는 대화는, 그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신분제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결국 그들의 혁명은 사적이익을 도모하는 정권세력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고, 그들의 혁명론은 “노비가 희망을 갖는 건 좋은일이지, 그러나 그것이 신념이 되는 건 곤란하시네”라는 좌의정의 말로 조롱당한다.

그러나 극은 마지막으로 전개되면서 이를 깨부숴 나간다. 진정한 혁명으로 이르는 길, 그 끝에 ‘신분제’라는 구조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들의 혁명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양반에서 노비를 잡는 추노꾼 까지, 글방에서 저자까지 이 나라의 구조적 모순을 가장 깊게 체험하고 확인한 이대길이 있다.

송태하는 언년이에 의해 각성한 이후, 이대길과 함께 하며 대안사회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대길이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에 사회구조적 모순을 깨달은 그는 “자네에게 많이 배웠다”고 고백하며 혁명으로 가는 진정한 길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는 가장 마지막에 “언년이든, 혜원이든 하나로 불릴 수 있는 사회”를 말하기에 이른다. 혁명은 실패했지만 그는 그렇게 성장해 갔다.

추노PD가 사실 주인공이라고 밝힌 업복이는 혁명이 실패한 마지막 순간 자신을 민중혁명의 기반으로 삼으려 한다. “이런 노비가 있었다는 걸 알린다면, 그건 개죽음이 아니라니”라며. 그는 신분제 가장 끝에 위치한 노비 출신으로, 궁궐 내부에 진입했고, 혁명을 조롱하고 막아서던 최대 권력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 그리고 그동안 신분제에 순응했던 아저씨 노비는 그 모습에 주먹을 꽉 쥐고 분노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혁명은 실패했다. 하지만 역사는 발전한다. 몇 천년을 이어온 신분제 사회는 지금 우리가 아는 것처럼 끝났다. 결정적인 이유는 상층으로 부터의 개혁이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 동학농민운동, 수 차례의 민중혁명 기도가 없었다면 정치는 민중의 요구를 받아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추노의 엔딩이 비극만은 아니었다.

추노의 이런 전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정권과 자본은 결탁해 민중들을 압박하고 있으며, 노동자 사이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며 신분제의 모순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비정규직의 수는 나날이 증가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를 막아내야 할 야당은 “자신이 속한 당으로의 대통령을 바꾸는 것”이외에 어떤 대안사회를 내놓지 못한다. 송태하와 그 일당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조 선비가 전향한 것 처럼, 이 사회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을 깨닫지 못하면, 이들 역시 언제든 권력과의 결탁이 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마땅한 대안정치를 찾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업복이가 끝봉이가 조선의 ‘신분제’를 느끼는 벽처럼, ‘자본주의’의 벽을 실감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넘어설 어떠한 사회를 꿈조차 꾸지 못한다. 마치 이 사회가 아주 오래전에 나왔고, 오랫동안 이어갈 것처럼, 그러나 결국 몇 천년을 이어져온 신분제는 깨졌고, 자본주의의 모순은 벌써부터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대안사회는 가능하다. 그것이 지금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송태하처럼 각성하고, 업복이처럼 대안사회를 만들 기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돈 없어 잘 곳 없고, 돈 없어 아프고, 돈 없고 교육받지 못하는, 비극을 장막을 걷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Posted by dalgona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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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림동 박 2010/03/29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에서 야당이란 정권을 잡지못한 2순위 여당의 또 다른 이름 일 뿐...

    공교육 살려내서 교육의 평등만 이뤄내도 희망은 있을텐데..

    교육이야말로 모든것의 희망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러다 나중에 노비표식처럼 얼굴에 수능 9등급 8등급..이렇게 찍는건 아닌지.. ㅡㅡ

20대 생태보고서(Ⅱ)

2. 20대에게 정치는 “없다”

결론을 내기에 앞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20대에게 정치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내까짓게 정치를 정의내릴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아니지만, 앞으로 이야기를 위해 ‘전제’정도라도 해 본다면, 정치는 피통치자의 동의를 얻어 통치자가 우리 사회를 전반적으로다가 조정하고 실행하는 어떠한 행위다. 이런 전제하에, 우리가 신경을 쓰든 안 쓰든, 이 행위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태어나면서 부터 죽을 때 까지, 우리가 이 정치에 영향을 받지 않은 적은 없고, 또 없을 것이다.

20대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지금 이 하수상한 시기에 20대 만큼 정치에 큰 영향을 받는 집단이 있을까? 그런데 기성세대로 부터 이 20대들이 “정치를 배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말일까?

사실관계부터 짚어보자. 지난 2007년 17대 대선 당시 꺾인 20대들의 투표율은 42.9%, 아직 안꺾인 20대 투표율은 51.1%였다. 전체투표율은 63%. 2008년 18대 총선투표율은? 20대 전반이 32.9%, 20대 후반이 24.2%였다. 전체 투표율은 45.9%였다.

최대한 많이 잡아도 ‘투표율만 놓고’ 보면 지금의 20대의 절반 이상이 정치에 관심 없는 셈이 된다. 이처럼 ‘참담한’ 수준의 결과가 나오자 이 사회는 20대를 향해 ‘걱정’이 약 10%, ‘비난’이 약 90%섞여진 비판을 날려대기 시작한다. “쟤네 어쩌려고 저러니, 이렇게 관심이 없어서 큰일이야” 등등등

정말 20대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을까? 물론 실제로 몇몇 사람들은 “투표날은 곧 쉬는날”이란 대명제하에, 빨간날 아닌 빨간날을 기념하야 쌔끈하게 휴일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게 꼭 20대만의 문제일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30대도, 40대도 그런 사람들은 있을 것 아닌가? 상대적으로 그 비율이 높다고? 이 역시 확인할 길 없다. 단순히 투표율만 놓고 투표날 놀러가는 몇몇 20대들을 인터뷰 한 다음, “20대는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 옳지 않다.

그렇다고 내 주변 사례를 빌어 “20대는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낮은 투표율이라는 숨길 수 없는 사실, 그리고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몇몇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20대는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얘기 대신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을 것이다. “20대에게 정치는 없다”고.(그리고 이것 또한 20대만의 문제는 아니니라)

사실 20대는 전반적으로 MB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20대 누군가가 20대 집단이 모여있는 곳을 가서 “사실 난 MB찍었어”라고 말했다간 즉각 “정신나간 녀석”이란 낙인이 찍히기 마련이다. 객관적 지표를 봐도. 각종 여론조사 대통령지지도를 살펴보면 보통 20대 층에서 가장 대통령 지지율이 낮은 것으로 나온다. 즉, 현 정권에 대해 가장 많이 반대하는 세대가 20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비판이 그들의 정치적 성향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을 투표장으로 인도하는 것도 아니다. 젊은 층들이 비교적 많이 모여 있는 인터넷 상에서는 친노적 성향이 강하고, 그 외 많은 20대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성향이 강하게 남아있지만, 실질적인 표를 계산하면 그 비중이 크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강한 것은 ‘MB효과’라고 보는 것이 맞다. 참여정부 말기를 돌이켜보면, 20대가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이룩한 민주주의의 성과(?)가 다시 노무현을 호출한 셈인 것. 즉, ‘반대를 반대’하기 위해 노무현을 선택했을 뿐, 그들의 정치적 성향은 오로지 노무현에만 향해있지는 않는다.

물론 노무현이 가진 인간적인 모습도 젊은 층위에겐 호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인간 노무현’을 좋아했을지 모르겠지만 참여정부 말기 ‘대통령 노무현’에는 큰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노무현 지지세력 만큼 ‘노무현 세력’에 불신을 가진 20대 또한 많다. 그리고 이는 박근혜도 비슷하다. 도토리 중 왕도토리인 박근혜에게 불신을 가진 20대가 많으나 호감을 가진 20대도 있다. “신뢰감”, “도덕성(적어도 그 놈 보다야..)” 같은 것들이 주된 이유다. 그러나 이 역시 ‘인간 박근혜’에 머물러 있다. ‘정치인 박근혜’에 대해서는 불신이 있다.


본론으로 넘어가자. 정치에 큰 영향을 받고 있고, 혹은 정부를 비판하며 노짱이든 박근혜든 정치를 관심있게 지켜보는 20대들에게까지 정치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현 정부를 반대하는 20대들은 왜 그 어떤 정치세력도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관심가져야 할 지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에겐 김대중 정부 때나, 노무현 정부 때나, 이명박 정부 때나 등록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것은 똑같다. 그 어느정부 때나, 아니 오히려 IMF이후 집권한 이 세 정권 하에서 살아가면서 오히려 ‘제대로 된’ 직장잡기, ‘예쁘게’ 결혼하기, ‘알콩달콩’ 살아가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들 앞에 놓여있는 것은 불안한 현실이다. 저임금에 목숨 간당간당한 직장, 결혼하면서 얻어야 할 수천만원의 빚, 낳지도 않은 아이들 걱정, 온통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 뿐이다.

그러니 심정적으로 ‘누군가’를 지지하면서도, 현실에선 투표를 하기 어려워진다. A를 뽑아도, B를 뽑아도, C를 뽑아도, 심지어 D를 뽑아도 이 현실이 바뀔 것이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투표는 해야죠, 근데 누굴 뽑아야 해요?”라는 ‘헐~’소리 나는 질문도, 나는 이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반값 등록금’을 보고 뽑아도 1년 만에 “난 그런 소리 한 적 없는데?”라 말하는 대략난감 대통령을 가진 나라에서 살아가다 보니 그런 것 아닌가?

노짱이거나 근혜공주거나 어차피 정치인들이 우리의 현실을 바꿔주지 못할 것이란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무관심해지고, 무관심은 다시 정치인들의 교만으로 이어진다. 어디서 부터 잘못된, 어디서 부터 문제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방정식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전히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긋지긋한 흘러간 옛 노래가 틀어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다시 한 번 유권자들의 무관심을 부를 것이다.

그럼 아직 집권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진보정치는 어떤가? 그들은 차선조차 아니다. 불신이고 나발이고, 20대들은 아예 그들을 모른다. “노회찬, 심상정, 강기갑, 열심히 하는 건 알지, 그런데, 뭐 찍으면 당선되겠나”는 의문, 아예 정치에서 배제되고, ‘정치’보다는 ‘운동’으로 취급받고 있는 현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20대들에게 진보정치는 ‘꽝, 다음기회에’에 다름 아니다.

왜 그럴까? 20대들 사이에서도 그들에게 “뭔가 아마추어적인 냄새, 다듬어지지 않은, 폭력적인, 비현실적인”과 같은 단어들이 나오고 있다. ‘조직’이 선거에 중요하긴 하지만, 민주노총에 안주해 대중으로 확장하지 못하고 있는 진보정치에 대한 일종의 냉소도 보낸다. “어차피 너네는 너네끼리 노니까”와 같은.

비정규직과 실업에 고통받고 있는 20대들을 위한 사업이라고 벌이는 것이. 고작 ‘강연회’정도인 상황에서 20대 마음잡기는 쉽지 않다. 한 명 딱 찍어서 쫒아다니며 달달달달 볶으면서 진보정치의 아름다움을 설파해도 그들의 마음의 벽을 허물기가 쉽지 않은데, 딱히 말하지 않아도 이쪽 진영에 관심을 보이는 20대들만 모아놓고 강연회를 벌이고, 이젠 모이지도 않는 학생조직 움직여서 선거운동원으로 동원하는 형태의 20대 사업이, 20대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눈에 선 하다.

진보 쪽에 아예 관심도 없는 한 친구는 “진보정치인들이 노량진 와서 같이 수업 들어보고, 같이 밥 먹어보라 그래, 같이 원룸 구하러 다녀보고, 20대 처럼 데이트 해보라 그래, 그 쪽 사람들이랑 놀지 말고, 우리랑도 놀아줄 수 있는 얘길 해보라 그래”라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래, 그런거다.

20대가 정치에 관심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을 품을 정치가 없다. 20대들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이 쑥덕쑥덕 얘기하다 떡 하니 뭘 내놓아 봐야,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세상은 변하고 20대들도 많이 변했다. 그런데 정치는 변하지 않았다. 기성세대는 그런 정치에 대해 20대들이 관심을 가지라고 닥달한다.

표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 나 역시 MB가 너무 싫지만, 참여정부의 공과로 인한 평가가 표로 표출되어 그를 당선시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래”라고 하고 싶지만, 언제까지나 그건 자위일 뿐이다. 아무리 자위하고 다른 사람을 닥달해 봐야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특히 진보세력에게 이번 지방선거는 그동안의 온갖 판단미스와 2004년 이후 더 이상 국민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전략상의 오류를 심판받아야 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어줍잖은 꼼수로 야당에 묻어가면서 그것을 ‘국민적 염원’이라고 말하지 말고, 확실하게 죽은 다음, 그들의 장점인 밑에서 부터 살아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예전보다 더 세련되고 참신해야 한다. 무엇보다 20대를 품고자 한다면, 앞선 편에서 말한 듯이 조직문화 개선이 진보정치에 가장 시급한 과제다.

Posted by dalgona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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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effian 2010/03/23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용 자체에는 불만이나 이의거리가 없지만..
    끝에서 두번째 문단(개중 첫째 문장)을 보고.. '추천'하지 않기로 맘 먹었답니다.

  2. 동의합니다. 2010/03/23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만 보면 대부분 20대들이 이명박 대통령 비판을 넘어 인간적인 모욕까지 주는 댓글을 쓰지만, 정작 현실 여론조사르 보면 다르죠.
    이번 지방선거에서 20대의 투표율과 결과에 따라서 인터넷에서만 갇혀있는 20대 유권자들에게 충격이 될지 지켜 봐야 겠네요.

  3. 합체 2010/03/25 0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보진영이라면서 갈라선 민노당-진보신당...아마도 다들 그 이유는 관심없을 것이다. 갈라섰다는 사실이 웃긴거다...그러면서 20대에 뭘 기대하나?

    뭐...누구 잘못인가 뭐 이런거 따지는 것은 우습고...아무튼 가출한 노회찬은 바보다.

    1923년에 임시정부가 민족의 염원에 부흥하지 못하고 띵까띵까 놀고 있을 때 정국 타계를 위해 회의를 열었었는데, 다들 나가고 결국 임시정부를 지킨 분은 김구 선생님이었다. 끝까지 지키면서 윤봉길 의거를 해내고, 광복군을 만들고...비록 이후에 일제의 항복, 이승만의 역적질로 임정 정통성을 제대로 잇지는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끝까지 임정을 지키면서 민족의 해방과 하나됨을 위해 힘쓰신 김구 선생님을 최고의 투사로 기억하고 있다.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과 노선으로 저마다의 일을 해내는 것이 물론 중요하겠지만, 무언가 쟁취하기 위한 길에 단결은 제 1의 기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득권 내지 강대국 같은 존재들은 분열을 조장하는 데 힘써왔었다. 그들도 아는 것을 진보진영이 모르면 되겠는가?

    그 이름이 민노당이 되건 뭐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제발
    다시 모여라

  4. Kill Dal 2010/03/26 2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초심을 잃지 마세요...화요일과 목요일 연재....지키세요..
    기대 하겠어요...달 기자님..

  5. 한니발 2010/03/28 0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터넷에서 정치인 욕하는 사람들 중 과연 투표한 사람은 얼마나 될런지...
    물론 저는 대선 때 군인이라 강제(?)참여를...

20대 생태보고서(Ⅱ)

1. 뭉쳐야 하는 이유, 뭉칠 수 없는 이유 - “20대, 불만을 쏟아낸다면”

어차피 “모여라”고 소리쳐봐야 모일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상징이 될 수는 있다. 지난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장갑차 사건 때 처음 모여든 촛불이 그렇고, 2008년에는 “광우병 쇠고기가 먹기 싫다”며 들어올린 촛불이 그렇다. 권력자들이 ‘겁을 먹을’만 한 일임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앞으로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97년 노동법을 총파업으로 막아냈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이 노동법은 2009년 ‘중재안’이란 이름으로 통과되었다) 오히려 그 이후 국가가 나도 모르게 내 통장을 보증으로 세운 빚잔치가 ‘뽀록’나며 더 힘든 세상의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미선이 효순이의 염원을 받아 당선된 노무현 전 대통령도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집값은 무섭게 올랐고, 물가도 팍팍 올랐는데 어찌된 것이 월급만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광우병 쇠고기를 반대해 들었던 촛불도 100만 명의 시민을 광장 앞에 불러 모았지만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편안하게 수입되고 있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쇠고기를 먹고 마시고 있을 수도 있다.

어 리를(a little...) 거슬러 올라가 봐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많은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스러져 갔으나 우리의 삶은 변한 게 없다. 이식된 자본주의는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열어주었을지 몰라도 더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을 ‘합법’이란 이유로 착취해 갔다.(설령 그것이 우리가 아니더라도 아프리카 소년이, 동남아시아의 소녀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기계가 일하듯 하루 종일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탈모와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일하던 중 새참을 먹는 것도, 막걸리 한 잔 하며 덩실덩실 노는 것도 사라졌다.

그나마 우리가 얻어낸 투표의 평등도 ‘돈이면 다 되는’ 요지경 세상은 앗아가고 있다. 일당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투표권 없는 투표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일에 치이는 대한민국에서 투표일은 휴일 이상의 의미를 갖기가 어렵다.(정치가들에게 가장 행복한 것은 무관심이라, 그들은 이러한 현상을 개선할 의지도 없을 것이다. 일부러 짜증나게 하는거 아냐?!)

                  △저.. 이거 언제 해결하실래요?

왜 이 빌어먹을 고단한 삶은 끝나지 않고 오히려 점점 우리를 짓누르는 것인가? 아파트 값은 어디까지 오를 것이며, 이발 한 번 하는게 큰 맘까지 먹어야 하는 내 월급으로, 몇 백만원의 사교육비를 감당하며 아이를 ‘이 나라가 원하는 새세상 일꾼’으로 키울 수 있을까? 그나저나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도 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도대체 몇 명이 모여 어떤 소리를 질러야 저들은 우리의 말을 들을 것인가?

그 얘기에 관계되었지만 조금은 다른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질문에서 나온 첫번째 이야기는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세상은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신자유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모여 소리를 지른다고 세상이 변할 것인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앞서 언급한 내 고민의 또 다른 축이자. “내 아주 전반적으로다가” 말하고 싶은 핵심이다.

앞서 나온 몇몇 가지 사례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보자. 나는 2001년 대학에 입학해 “동작 봐라”와 “개념 없다” 등 군사용어가 난무하는 살벌한 술집에서 막걸리 두 통을 담은 냉면 사발, 그것도 두 그릇을 원 샷 해야 했다.(두 그릇인 이유는 또 다른 군대용어 ‘연대 책임’이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자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운동권이자 열렬한 반신자유주의자들이다. 반미주의자들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대동단결을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또 하나. 지난 2008년 말 촛불집회가 사그라지던, 그리고 정권이 복수의 칼날을 갈던 그 엄중한 시기, 민주노총 000위원장이 피신해 있던 한 여성 조합원의 집에서 있어서 안될 일이 일어났다. 민주노총 간부에 의한 조합원 성폭행 사건,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나?

민주노총은 아직도 그 사건에 대해 ‘징계’ 등 어떠한 결정을 내린 바 없고 이 안건은 몇 차례 대의원 대회를 통해 “이거 우리 다음에 하자”는 결정이 떨어졌다. 피해자와 피해자 지지모임 중심으로 다행히 계속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왜 이런 문제를 피해자 본인이 직접 나서야 하는가!) 언제 해결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민주노총 총연맹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집합소인가? 아니다. 그들은 열렬한 반신자유주의자들이다.

자. 당신은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을 반대한다. 그런데 어떤 다른 사람도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을 반대한다. 그러면 당신은 그와 연대해야 할 것이다. 함께 소리를 지르고, 돈이 아닌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함께 외치고 주장해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파시스트라면?, 권위주의자라면? 그 사람이 성매매를 한다면, 그와 연대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런데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을 반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른바 ‘진보적’인 사회에서도 지독할 정도로 이딴 것들이 만연하다. 나이가 어리다고 의견결정에서 배제되고 성희롱과 성추행은 만만치 않게 그 사회에서도 만연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전선 하나에는 비교적 강고하게 맞서고 있지만, 그 내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만만치 않다.

집회에 한 번 나와 본 후 나 역시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이제 그나마 명맥도 끊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전선을 쳐야 할 진영, 그리고 그 안의 어른들은 주구장창, 신자유주의에 물든 아이들을 개탄한다.

이미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 익숙해져 버린 젊은 친구들을 조직하자고 동분서주 해 대지만 이따위 조직문화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옛 민주노동당 조합원들의 노조결성의 앞길을 막아선 것 또한 민주노동당이며 한 진보적 단체는 월급은 커녕 ‘활동은 순수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재산권과 노동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착취하고 있다.

민주노총에 젊은 활동가들이 이제 얼마나 남았는가? 진보정당에 젊은 정치인은 몇 명이나 있는가? 어차피 이 사회가 젊은 리더들을 좀처럼 용납할 수 없는 분위기라고는 하지만, 진보진영 내부에서는 그 분위기에서 자유로운가? Never.

(그렇다고 우리는 김문수와 이재오가 간 그 길을 가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그래도 비교적 저쪽보다는 이쪽의 분위기가 더 나으니까.)

만약, 누군가의 말 대로 20대가 연대를 형성하고 짱돌을 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닌 권위주의, 파시즘, 왜곡된 여성주의, 반여성주의에 맞서 들어야 할 것이다. 일종의 문화혁명일 것이다. 권위를 배격하고 자유와 다양성을 찾아야 하며, 나이살 좀 많다고 “000 나와!, 어디서 그냥”이라고 말하는 어른들을 부끄럽게 해야 한다.

20대, 불만을 쏟아내야 할 지점은 거기다.(물론 이 불만을 쏟아낼 때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기본적인 상호존중은 품고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 불만만 쏟아내는 것도 ‘나쁜 짓(???)’이다.) 다만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울 때는 강고한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수준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드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물론 이는 여기에 동의하는 3~40대, 50대, 60대 그리고 10대와도 함께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얘기를 가다듬어야 하며, 어른들은 인간에 대한 존중을 잃지 말아야 한다.

대표와 일반사원이 사단장과 이등병 만나듯 ‘훈육’이 아닌, 맞담배 피며 활발하게 조직문화를 놓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의원이 보좌관에게 까지 정보를 숨기는 형태를 비판하고 ‘함께 얘기하자’고 말해야 한다. 정당의 대표는 당원과 자주 논의할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대통령은 다수, 소수정당 가릴 것 없이 여야 대표들을 열어놓고 만나야 한다.(응? 이건 아닌가?)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 경쟁을 위해서는 그러한 것이 효율성에 침해된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효율성 보다 합리성, 경쟁력 보다 연대를 신경 써야 할 것이다. 그게 안된다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자가 아닌게 아니다(뭔 말이래...)

어른(?)들은 내가 지금 여기에 하고 있는 것처럼 쓰잘데기 없는 얘기도 듣고 자신의 의견을 말해야 한다.(징징대는 건 아니구요 뭐..) 그들의 논리전개가 미흡하고 비록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함께 논의하고 종국에는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조직문화의 혁신 없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권위주의 왕조를 교체해 봐야 또 다른 권위주의 왕조가 나왔던 것 처럼.

당신은 성매매 하는 비정규직, 권위적인 진보정치인과 믿고 함께 갈 수 있는가? 성희롱 전력이 있는 정치인을 중앙당에서 의욕적으로 영입하는 개혁정당에 투표할 수 있는가? 난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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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lgona82 2010/03/09 14: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와서 보니 비정규직이 다 그런것 같은 뉘앙스가 있는 제목이네요, 급허게 제목을 달다보니, 그런 거 아니란거. 아시죠? ^^

  2. HD 2010/03/09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헐...ㅋㅋ제목 어쩔거임 ㅋㅋㅋ 안티 양산을 위해서 이런거 아니죠?ㅋㅋ

  3. outOfBrain31 2010/03/11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재물(?) 잘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4. ..!.. 2010/03/12 0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천을 원하시면 "아으어우어어엉으어어응아어아오으응"을 외쳐주세요!

  5. 달달달 2010/03/15 08: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돌아왔다............I'm back....
    요즘 졸 바쁜가보오......여자만나느라....ㅡㅡ;
    나도 안 만나주고..ㅋ

  6. 새글좀 2010/03/21 0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디 여행 가셨나요?바쁘신가?ㅋㅋ

  7. 옳거니 2010/03/22 0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지요.
    말 한번 시원하게 잘 하시네요.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공자님 말씀 따위로 세상은 변하지 않아”, 오답이다. 공자님 말씀은 ‘중국왕조의 공식사상’으로 천년의 세월을 지내왔다. “마르크스의 세상은 죽었다”, 오답이다. 세계에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난 바 없다. 마르크스의 세상은 탄생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죽을 리 없다.

차라투스트라가 무슨 말 했는지에 별로 관심도 없고, 은행 외에 내가 어떤 사회랑 계약을 했는지도 모르는 20대 끝자락 청년은 그래도 뭔가,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을 설계하고 혹은 바꾸려한 사상에 대해 궁금증 하나는 놓지 않았다.

자본주의 세상이 딱히 끌리지 않지만, 사회주의가 뭔지는 알지도 못하고, 민주주의가 좋은 거 같긴 한데 선거라는 민주주의 행위의 결정체의 결과물이 지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찬란한 업적들을 보면 이거 꼭 민주주의 해야 하는 건가란 생각도 들고,

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계시’라도 받지 않는 다음에야 그냥저냥 한숨만 푹푹쉬며 그냥 내일 출근이나 해 대니, 그런 궁금증 놓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요순시대는 그런거 몰라도 좋았다는데, 정말 좋긴 좋았나 보다)

“플라톤이 사과 심겠다는 그 사람 맞나용?”이란 무식한 생각이나 떠올리는 내게『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은 분명 좋은 계기가 된 건 사실이다. 그만큼 재미도 있고 이해도 쉽다.(저 어려운 얘기를 쉽게 전한다는 것은, 저 어려운 얘기를 마스터 했다는 것 아닌가! 경의를 표한다)

재미있는 것은 서양과 동양철학이 양분되면서도 혼재되어 있다는 것, 정약용과 루소가, 마키아벨리와 한비자가 조우하는 기가 막힌 장면을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재미나다.(저 만남을 성사시킨다는 것은 저 어려운 얘기를 마스터 했다는 것 아닌가! 경의를 표한다)

*                   *                 *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혁명은 봉건제도의 낡은 틀을 깨고 나오기 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지 결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왜 사회주의 혁명이 영국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나지 않고 러시아와 중국 같은 농업 국가에서 일어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만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눈 씻고 봐도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사회주의자들이 집권한 혁명이었지,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는 말이다.(p50. 평등 사회를 향한 인류의 꿈)

“100년 전 영국에서도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공포의 대상으로 간주되거나 경멸의 대상으로 비웃음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러한 사회주의에 교양과 품위의 옷을 입혀준 이들이 바로 페이비언 협회 회원들이었다. 따라서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마르크시즘의 영국식 변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의 사회주의를 마르크시즘으로부터 구제한 것이 페이비언주의이다. 1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의 관점에서 재평가하면 대륙의 마르크시즘이 영국의 사회주의에 미친 영향보다 페이비언주의가 대륙의 사회주의에 미친 영향이 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p60. 평등 사회를 향한 인류의 꿈)

“플라톤을 비롯한 그 시대 지식인들의 말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원래 아테네에서 사용된 민주주의란 말은 ‘민중에 의한 지배’를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말의 원 뜻이다. 그런데 민중이란 누구인가? 국민 대다수를 이루는 민중은 어느 시대든 재산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인 것이다”(p73. 역사상 가장 안정적이고 강력한 정치사상)

“다른 것도 그렇지만 나치의 유태인 정책을 보면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태연하게, 확신에 차서 학살을 저질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그릇된 신념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투쟁과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사회진화론이었고, 두 번째는 민족 안에서 우수한 집단을 창출하려 한 우생학이었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파시스트들이 광신한 인종론이었다”(p124. 왜 그들은 나치즘에 열광했는가?)

“(전략)유학이 아닌 다른 사상을 공부해서는 벼슬자리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양한 사상을 주장하는 것은 ‘국론 통일’이라는 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이를 보이지 않게 금지했다. 당태종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과거제를 법으로 정하고 실핼했는데 첫 과거 때 전국의 수재들이 줄지어 시험장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고 한다. 아아, 이로써 천하의 호걸들이 모두 나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왔군 그래’”(p158. 중국 왕조의 공식 사상)

“중국 역사에 나오는 탕임금 이야기를 통해 논리를 펴고, 마지막에는 장자의 말을 인용해 점잖게 끝맺고 있지만 우리는 정약용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왕은 잘못하면 갈아 치울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푼수를 떠는 사람일랑 부끄러운 줄 알고 가만히 있어라!’ 조용한 듯하면서도 천둥소리가 나는 글이다”(p246, 조선왕조 재건 프로젝트)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77년 한국의 GNP는 1인당 1,000달러였다. 2010년도로 가고 있는 지금 한국의 GNP는 줄잡아 2만 달러이다. 우리는 마음껏 대학의 낭만을 향유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경쟁의 현실에 목줄을 매고 다니는 애완용 강아지 같다. 왜 이러는가? 왜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잡지 못하는 청년이 300만 명에 육박하는가? 자본의 축적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적대를 의미한다. 노동을 지배하려는 자본의 전략은 광범위한 근로 대중의 실업을 유발한다는 마르크스의 고발과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p298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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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생태보고서(Ⅱ)

1. 뭉쳐야 하는 이유, 뭉칠 수 없는 이유 - “20대의 착각, 40대의 착각”

앞선 얘기를 소중한 사례를 들려준 친구들에게 전하자, 친구들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게 돼?”, “응?”, 이건 대답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반문이다. 그냥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말한 건데, 내가 할 것도 아니면서 생각해보니 너무 세게 질러버렸다. ‘뭘 해야 할지’는 머리 속에 둥둥 떠다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젠장, 거기까지 생각한 적 없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건가?

‘어떻게’라는 막연한 물음에 앞서, ‘해야 할 것’을 생각했을 때 암담한 것들을 몇 가지 떠오른다. ‘연대’, ‘공동행동’, 말이야 좋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할 것인가? “‘그 무언가’에 피해를 보는 대중들”이 해야 한다. 그런데 대중들이 플래시몹도 아니고 힘들고 위험한 이것을 할 것인가? 아마 하지 않는다는 쪽에 돈을 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유모차에 태워진 아기부터 7~80대 까지, 촛불은 이들을 포괄할 수 있었다.

‘민중들의 고통을 깃발로 승화시킨 대한민국 집회들’은 사실 이미 조직된 노동자들(그나마도 노조 상층에 있는 전임자들)이거나 운동에 눈을 뜬 학생들이 중심이 된다. 2008년 촛불집회는 그렇지 않았지만, 흘러간 역사는 흘러간 역사일 뿐, 다시 그들이 광장에 모이리란 보장이 없다. 오히려 촛불집회로 인해 관철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슬프지만 ‘패배의 경험’이 다시 그들을 광장으로 불러내지 않을 것이다.

실제 평범한 20대들, 바쁜 30대들, 자식 걱정하는 40대들, 명예퇴직을 앞둔 50대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 “달님께서 가라사대, 고통 받는 자. 이리로 모이라”고 해봐야,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군사독재시절 용어같은 ‘연대’란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이 고통 속에서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20대들은 토익책을 들고 자격증을 딴다. “남보다 나부터 잘 사는 사회”, ‘루저’가 되지 않는 편이 진정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3~40대 옛 ‘전사’들은 그런 20대를 비난한다.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쟤들은 정말 스스로 무덤 파는지도 모르고 편안하게들 살어~”라며, 50대는 “그놈이나 그놈이나”라며. 그래 그와 같은 20대의 착각, 40대의 착각이 이 연대를 방해하는 핵심적인 것들이다.

그런 착각을 만든 장본인은 이명박이지만 이명박이 아니다. 착각은 ‘자본주의를 쿨하게 살아가는 방식’이란 측면에서 대한민국 자본주의 상징인 이명박이 만들었지만, 단지 이명박으로 인해 이러한 세태가 만들어 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명박은 아니다.

이런 복잡한 관계이기에, 우리는 이명박을 반대하면서도 이명박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이는 반민주성에 반대하지만, 그가 반민주성을 가장 아름답게 구현하는 방식, 그리고 그 방식에 믿는 구석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우리가 이명박을 지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뭉칠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하나하나 갈라져버렸다.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려버렸다. 20대들은 원스펙과 식스펙으로 갈려버렸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의 비율은 점점 늘어만 가는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정규직이 될 일만 도모한다. 여섯 가지 스펙으로도 취직을 이뤄내기가 어려워지는데, 우리는 이상하게 더 스펙을 취득할 일만 도모한다.

이는 지배층이 언제나 ‘예외적 현상’을 두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개천에서 용나는’ 경우를 용납한다. 덕분에 언제나 “자기만 열심히, 성실히 노력”한다면 신분상승의 기회는 주어진다. 문제는 이 등용문의 폭이 상당히 좁고, 그나마도 점점 줄어든다는 것일테다.

개천에서 용이 등록금을 감당 못해 스러지거나, 미꾸라지들이 아픈 몸 하나 돈 없으면 치료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언제나 “예외적 현상”을 생각하고 행복해 한다. 모든 미꾸라지가 용꿈을 꾸는 처지, 때문에 미꾸라지가 주변의 미꾸라지를 비웃는 일들, 이것이 우리의 연대를 막는다.

“저항하자”고 외치는 사람이 ‘루저’가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에 순응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루저’가 된다. 우리의 마음은 저항에 가 있는데 현실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탓이다. 때문에 우리는 순응하면서도 저항한다. 진보적이면서도 아파트 땅 값에, 자식 교육에 보수적이 된다. 이러한 피지배층의 정체성 혼란, 이 땅을 지배하는 지배층이 지배하기 딱 지배적인 방식이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연대인 ‘선거연대’조차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명박 반대의 기운이 높다지만 정부 국정지지율은 50%를 넘고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나머지 모든 정당을 합친 지지율보다 높다. 그런 상황에서 반MB한다고, ‘일 낼 수’있겠는가?)

그리고 연대를 가로 막는 더 큰 문제가 있다. 그 문제는 다음번에..

Posted by dalgona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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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J 2010/03/02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감가는 글입니다.

    세대가 중요한게 아니라 착취 당하는 노동자끼리 연대해야하는데 덜착취 당하는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착취한다는데 현실이군요.

    전 20대는 아니지만 애정을 가지고 대화해보면 그들도 우리세대랑 많이 다르지는 않더군요.

    단지 제가 사회들어올때보다 힘들어 져서 안타깝더군요.

    물론 네가지 없는 20대도 있지만 다른 세대에도 그런 사람은 있지 않나요

  2. dent 2010/03/03 0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면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요즘은 그 부분에 대한 비판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데 정규직에 도덕적 비난만 퍼붓는 건 사태를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랜드, 뉴코아, 쌍용을 보세요. 비정규직과 연대해 투쟁했던 정규직 (쌍용은 이 범주에 넣기 좀 거시기하지만) 이 얼마나 '작살'이 났습니까. 김경욱 위원장 등은 어떤 고초를 겪고 있습니까. (그 분 요즘 어찌 지내시는지 정상근 기자님이 한 번 취재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뜻있는 사람'은 세대를 초월해 언제나 소수일 수 밖에 없는데 지금은 그 소수들의 입지가 너무나 줄어버렸어요. '정규직'을 비판 하더라도 그들 가운데 뜻있는 사람들, 뜻은 있지만 나설 순 없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주는데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요?

    • dalgona82 2010/03/09 14: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김경욱 위원장님은 작은 사업 하나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확인해보고 기사든 블로그든 쓸게요 ^^

  3. أحمد 2010/03/03 0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사귀게 된 와 함께 이슬람 )))

    http://www.acquainted-with-islam.blogspot.com/

  4. 필자가여자네 2010/03/03 2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서 다음편도~~~

  5. 회사원 2010/03/08 0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전문성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