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평등-기후 위기의 교차,
    상호교차적 사회·생태정책의 필요성
    [정의 경제] 노동-녹색의 연대가 의미 있기 위해서
        2023년 11월 01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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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뉴가 하나보다 둘이 더 낫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 각 정치정당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계절이다. 기존의 기득권 양당보다 소수정당들은 한층 상황이 어렵다. 위성정당 폐해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그나마 제한적인 연동형 비례대표제마저 이전으로 돌리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국면에서 정의당과 녹색당 등이 소수정당들에게 불리한 제도의 틈을 파고들기 위해 몇 가지 선거연합 방안을 강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하여 각 정당 당원들 내부에도 얼마간 논쟁과 이견이 일고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는 그 방안의 정당성이나 타탕성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려 한다. 대신에 별로 관심받지 못했던 정책 비전과 공약 기획 차원에서 접근해보려 한다.

    예를 들어 정의당은 그동안 중심으로 삼아왔던 복지국가 비전과 노동/분배정책 기조에 얹어서 기후/생태정책 메뉴를 추가로 얹으려 하는 것일까, 아니면 기존의 방향과 정책의 전면 수정을 생각하는 것일까? 메뉴를 추가한다면, 유권자들에게 과연 비전과 정책이 하나보다는 둘이 더 호소력이 있을까? 기존의 방향을 수정하려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그 역시 유권자들에게 더 매력적일 수 있을까?

    녹색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존의 기후/생태정책 기조에 더해서 노동/분배 이슈를 포용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인 것인지를 유권자들과 먼저 공유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각 정당들이 비전과 정책은 별개로 하고 순수히 제도적 제약을 탈피하려는 기술적인 선택을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를 향한 공동비전과 전망, 최소한의 공동공약에 대한 새로운 준비 등이 없이, 기술적으로 선거연합구도를 만드는 데 그친다면 기대하는 효과는 크지 않을 수 있다.

    기존의 노동정치와 녹색정치를 바꾸려는 의지

    최근에 주목해야 할 흐름이 있다. 기존의 노동/분배정책이 점점 더 한계에 직면하고 전통적인 복지국가 전망마저 설득력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기후/생태위기 때문이다. 안정되었던 기후와 생태 시스템이 붕괴되면 우리가 사는 사회도 붕괴된다. 하지만 그 붕괴는 한꺼번에 모든 인류에게 종말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산과 권력이 없는 취약한 계층의 삶의 붕괴로 현실화된다. 지난 여름 반지하 참사 등 이미 기후재난이 불평등의 아래쪽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고, 그 결과 불평등의 골이 더 깊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기후와 생태위기를 막으려면 이제 물질적 무한성장을 그만두고 성장 의존형 경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보수는 물론 기존의 진보적인 복지국가 모델 역시 팽창하는 성장주의에 편승해서 설계되었고 구조화되었다. 성장주의적 복지국가는 일시적으로 사회 내부 구성원의 사화안전망 강화에 기여했지만, 외부적으로는 기후/생태 악화를 동반했다. 복지국가의 모범인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부분적으로 기후/생태 위기에 대응하는 정책들로 보완하려 했지만 충분치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기존의 성장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은 우리의 비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기존 노동정치는 명시적으로 성장주의적 복지국가 비전을 버리겠다는 의지를 공적으로 분명히 말해야 한다.

    전통적인 기후/생태 위기 정책들도 마찬가지로 일정한 한계에 직면했다. 탈성장 비전을 포함해서 성장주의 경제와 단절하겠다는 전망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매우 강력한 ‘분배정책’이 필요하다. 탈성장이 ‘더 이상 파이를 키우지 않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파이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국민들에게 분명히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장 없는 경제에서 기존의 복지 시스템(건강보험체계, 연금보험체계나 교육복지 등)이 어떻게 지속가능할 수 있는지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녹색정치의 비전에는 선명한 분배개혁 전망이 필요하다.

    더욱이 최근 기후위기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례가 없는 ‘미지의 영역(uncharted territory)’에 들어섰다. 우리가 알던 세상은 사라졌으므로 완전히 다른 발상과 대응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중산층이나 어느 특정 계층들만의 참여로 기후/생태위기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일부 기득권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계층들의 참여 공간을 열기 위해 사회구성원들의 온실가스 배출의 불평등과 서로 다른 책임을 인정하고 공정한 부담을 요구해야 한다. 기후운동이 ‘기후정의운동’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동기후, 복지생태가 교차되는 시점이 왔다.

    노동정치가 성장주의적 복지비전을 버리고 불평등 위기와 기후위기를 통합적으로 대응하는 방향전환을 하는 한편, 녹색정치도 과감한 분배개혁 전망을 제시하고 불평등 양상에 어울리는 기후대응정책으로 초점을 이동할 필요는 이처럼 더욱 깊어지고 있다.

    사실 오랫동안 노동/분배 이슈와 기후/생태 이슈는 별개로, 또는 느슨한 연결을 유지하는 정도로 각각 발전해왔다. 때문에 시민사회도 정당정치도 각각 별개로 움직이거나 진화해온 것이다. 하지만 불평등과 기후위기가 극도로 심화되는 현재의 추세는, 매우 현실적인 공간에서 이 둘을 서로 깊숙이 교차시키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뤼카 상셀이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한 후 “경제적 불평등이 환경적 불평등을 대체로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맥락이나, 같은 프랑스 경제학자 엘로이 로랑이 “사회적 불평등은 생태 위기를 촉발하고, 이는 다시 사회적 불평등을 가속화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모두 여기에 있다. 교차성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면 노동/분배 이슈와 기후/생태 이슈 역시 확실히 현실에서 교차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상호교차성은 세계, 사람들, 그리고 인간 경험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이다. 나 자신과 사회적, 정치적 삶의 사건들과 조건들은 하나의 요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다양하고도 상호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많은 요인들에 의해 형성된다.“(패트리샤 힐 콜린스)

    그 결과 최근에는 ‘사회적으로 정의롭고, 생태적으로 안전한 미래’라는 통합된 비전을 향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미 2012년 옥스팜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는, 시민들로 하여금 사회적 기초의 아래로 빠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태적 경계 역시 넘어서지 않도록 ‘정의롭고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공공정책의 기본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도넛 경제모델’이다.

    도넛경제 모델은 코로나19가 터진 이후 암스테르담, 코펜하겐, 필라델피아, 포틀랜드 등 수 많은 도시들에게 공식 비전으로 채택할 만큼 확산되고 있으며, 유사한 비전이 국가 수준, 글로벌 수준에서 쏟아져나오고 있는 중이다. 이제 사회정책 따로, 녹색정책 따로는 안 된다. ‘사회-생태정책’이라는 하나의 전망, 하나의 정책이 필요하다.

    Image: courtesy Doughnut Economics Action Lab

    노동/분배정책, 기후/생태정책 각각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생태정책으로.

    그러나 사회적 정의와 생태적 안전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둘 사이의 상호촉진보다는 충돌과 갈등 양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강력한 성장주의적 복지확대는 여러 곳에서 기후/생태위기를 악화시켜왔다. 복지를 물질적 소비의 확대와 등치시키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생태파괴의 영향을 무시하고 더 많은 주택, 더 많은 에너지, 더 많은 자동차(그리고 이를 위한 주차공간)가 여전히 일부에서 삶의 질을 높이고 복지를 확대하는 것으로 오인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사회구성원들 내부의 환경파괴 책임 차이와 경제적 격차를 고려하지 않고 기후/생태위기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 역시 서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탄소세를 반대했던 노란조끼 운동이나 최근 네덜란드에서 축산규모 제한에 반대하는 농민들 저항, 한국에서 재생에너지 설치를 둘러싼 갈등들은, 대체로 사회 내부 불평등이 제대로 투영되지 못한 기후/생태적 대응이 낳은 결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최근 사회운동에서 사회적 정의와 생태적 안전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전통적인 노동운동이나 복지운동들이 기후/생태적 이슈를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고, 기후/생태운동 단체들도 사회구성원들의 불평등 상황이 반영된 기후정의운동, 생태정의운동으로 진화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전통적으로 불평등 정책에 집중했던 연구자들은 경제적 불평등을 환경적 불평등으로 확장시키고 있고, 기후/생태 정책에 초점을 두었던 연구자들도 정의로운 전환을 확장시켜 ‘생태적 경계선’이 아니라 ‘생태-사회적 경계선’으로, ‘생태적 티핑 포인트’가 아니라 ‘생태-사회적 티핑 포인트’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노동정치와 녹색정치가 과거와 달리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연대하고 공동으로 전략을 짜야 한다면 바로 이런 이유들로 그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다. 다시말해 시민 유권자들의 관점에서 노동정치와 녹색정치가 별개로 가서는 미래사회를 열 수 없고, 당장의 심각한 불평등과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평등 위기와 기후위기는 따로 풀리지 않는다“는 점을 더 많은 시민들, 더 많은 유권자들과 공감하게 될 때, 그렇다면 노동정치와 녹색정치는 어떤 식으로든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받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현재 노동정치와 녹색정치를 연대하려는 움직임 속에는, 노동/분배와 기후/생태의 교차적 전망에 대한 절박성이나 교차 정책의 준비 과정 등이 적어도 시민들 눈에는 생략된 것처럼 보인다. 양당 중심으로 짜여진 제도적 제약을 돌파하는 것도 필요하고, 소수정당들이 원내 진입을 통해 의회공간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적든 많든 유권자들의 인정과 지지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함께 해야 하는 이유를 각 정당 당원들은 물론 시민들의 삶의 관점에서 공유해 나가는 과정이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정의로운 경제>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녹색전환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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